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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관종, 정치적 암살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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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2006년 영국 BBC는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경호 책임자였던 파비안 에스칼란테가 펴낸 책을 토대로 제작한 것이다. ‘638’은 1959년 카스트로 집권 이후 쿠바 정보당국이 집계한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 시도 횟수다.
카스트로 암살 시도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혁명에 반대해 쿠바를 떠난 망명자들이 주도했다. 카스트로의 담배에 폭발 성분을 넣고, 손수건에 독극물을 묻히거나, 라디오에 독가스를 가득 채우는 방법 등이 시도됐다. 심지어 카스트로의 전 애인을 동원해 독살을 시도했으나 화장품 속에 넣어 운반했던 독약이 녹아버려 실패하기도 했다.
1962년 미국은 소련의 미사일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무력으로 쿠바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또한 카스트로를 제거한다고 해도 혁명 동지인 동생 라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가 정권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커 미국 입장에선 실익이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은 암살 계획에 병적으로 집착했는데, 이는 눈엣가시였던 카스트로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암살의 대상과 동기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고대·중세에는 왕권을 빼앗거나 지키려는 욕망에 따른 암살이 많았다. 황제와 친족들이 대상이었고, 음모를 꾸미는 것도 그들이었다. 유럽의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6~17세기엔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암살이 성행했다. 혁명의 시대였던 18~19세기엔 구체제의 왕족과 정치인, 반란군과 혁명 지도자들이 암살의 희생자가 됐다.
20세기 이후엔 대통령과 총리 등 고위 정치인, 혁명가 외에 인권운동가, 예술인, 언론인들까지 암살의 타깃이 됐다.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던 미국처럼 국가가 주도한 암살이 늘어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인데, 모든 시대의 암살에는 증오와 혐오가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생각이 다른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특정인만 제거하면 정치·이념적 목표를 달성해 대의를 이룰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 암살을 부추겼다.
현대에는 그저 관심을 끌려고 사람을 죽이는 ‘관종형 암살’까지 발생했다. 1980년 ‘비틀스’ 멤버였던 존 레넌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의 범죄 동기는 ‘유명해지고 싶어서’였다. 이듬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총을 쏜 존 힝클리 주니어는 배우 조디 포스터의 존경과 사랑을 얻기 위해 ‘역사적인 거사’를 실행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 13일 유세 중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가해진 총격은 극단적인 갈등 상황에 무력한 현대 정치 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비열하고 야만적인 암살·테러가 대화와 타협을 압도하는 상황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믿음도 무너뜨린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세력을 불리고, 저급한 독설로 인지도를 높이려는 ‘관종’ 정치인들이 각광받는 우리 정치는 미국보다 정치적 암살과 테러의 위험에서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김구, 송진우, 여운형 등이 암살당한 해방 정국보다 지금의 정치 상황이 낫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권력자가 모반의 음모를 막기 위해선 민중의 증오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군주의 사망에 민중이 슬퍼할 정도라면 반역자는 음모를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오히려 증오를 양분으로 활용한다. 타 진영은 물론, 진영 내부의 경쟁자까지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제거하려 한다. 자신을 향한 상대편의 증오도 마다하지 않는다. 적의 증오가 클수록 진영 내부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미 정치인들의 언어엔 모반, 배신, 정치적 테러가 가득하다. 멈추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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