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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과 20년’ 정서경 “73만 동원 이 작품, 댓글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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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부터 ‘헤어질 결심’까지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시나리오 작가
한예종 땐 “회생 불가 각본” 평 듣기도
‘첫 시나리오’ 두 편 묶어 책으로 출간
‘여기서 웃어야 하는데···.’
싸늘한 객석 분위기에 정서경(49) 작가는 당황했다.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개봉 때다. 그가 박찬욱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쓸 때 “떼굴떼굴 구르며 웃었던” 대목이었다.
그런데 웃는 사람은 오로지 한 명. 옆에 앉은 자신의 친구뿐이었다. 관객은 영화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느낌”, 그것이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가 ‘친절한 금자씨’(2005)에 이어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두 번째 작품이다. 정신병원이 배경인 로맨틱 코미디.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믿는 영군(임수정)과 남의 특징을 훔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순(정지훈)이 주인공이다.
돌아와 포털 사이트의 관객 평점을 봤다. 주인공 이름이 영군과 일순인데, 평점도 0과 1이 대다수였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관객 수는 결국 73만 명에 그쳤다.
“괴로웠어요. 하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댓글까지 다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죠. 정말로, 이유를 알고 싶었거든요.”
왜 관객의 마음에 다다르는 데 실패했는지, 그땐 몰랐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았다. 괴롭지 않고서는 알아낼 수 없다는 것. 그는 괴롭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정서경이 될 수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순탄했으리라 예상했다. 실패나 절망이 얼룩덜룩한 여정이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개봉일 기준 데뷔작인 ‘친절한 금자씨’부터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2022)까지, 탄탄한 성공이 정서경을 만들었을 거라 여겼는데.
“지금도 (시나리오를 쓸 때) 날마다 실패해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길을 다 탐색했는데도 모두 ‘별로다’ 싶으면 정말 절망스럽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깊이 절망하고 나면 길이 생기더라고요.”
길을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그에겐 그렇다. 이제껏 걸어온 길은 모두 부수고 매번 다른 길을 개척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여정이었으니. “박찬욱 감독님과 시나리오를 쓸 때도 이런 원칙만이 있었어요. ‘그 어떤 클리셰(상투적인 표현)와도 비슷하지 않게 쓴다’.”
드라마라는 새 장르에 도전한 이유도 그 연장선이다. ‘박찬욱 감독의 정서경’이 아닌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장르였다. “사춘기가 지나면 인간은 독립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는 드라마 ‘마더’(2018)로 틀에 박힌 모성을 전복하고 ‘누구나 엄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작은 아씨들’(2022)에선 돈이라는 세속적 욕망의 도구와 맞물려 성장하는 자매들의 서사를 그렸다. 이제 정서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동적인 장르다.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내년 초 디즈니+(플러스)에서 방영될 그의 세 번째 드라마 ‘북극성’에선 그 장르가 어떻게 진화할지 기대되는 이유다.
정 작가를 21일 서울 한남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손엔 막 인쇄소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 들려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상원 졸업 작품인 시나리오 두 편을 묶은 ‘나의 첫 시나리오’(돌고래)다. 23년 전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정서경’이 이 책 속에 있다. 그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는지는 설명만으로 절대 알 수 없고, 알려줄 수도 없기 때문에 정말 부끄럽지만 내가 나의 첫 시나리오를 보여준다”고 서문에 썼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진로를 철학과로 정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어감이 멋지고 품위 있으며 중성적이라서. 그렇게 들어간 서울대 철학과를 4학년 때 그만두고 한예종 영상원 시나리오과에 들어갔다.
-철학과를 택한 결정이 실패였나요.
“저는 철학을 공부하기에 논리적 사고력이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인간과 세계를 둘러싼 비밀을 알게 될 것 같았는데, 실제 다녀보니 아니더라고요. 특히 비트겐슈타인! 저는 그것을 통과하지 못했어요. 논리철학이 전공필수였는데, 영원히 통과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 뒤 시나리오를 전공한 이유는요.
“어릴 때부터 막연히 뭔가를 쓰면서 살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글이 아닌 다른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고요.”
-대학을 그것도 4학년 때 그만두기는 쉽지 않은데.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걸 알지만, 저는 인생의 여러 선택을 대부분 충동적으로 정하면서 살았어요. 시나리오도 그렇게 쓰죠.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쓰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면 늘 ‘우대’해요.”
-시나리오 전공은 어땠나요.
“힘들었어요. 내가 과연 여기에 맞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아, 이거 큰일 났는데’ 싶었으니까. 어떤 것들은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거 같잖아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그런 차원이 아닌 너무나 막막한 세계였어요.”
그는 ‘나의 첫 시나리오’에서 이런 일화를 들췄다. 영상원 첫해였다. 교수는 모든 학생 작품 중 그의 것만 콕 짚어서 “회생 가능성이 없으니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했다.
-이유가 뭐였나요.
“제가 쓴 이야기에선 뭘 찾아낼 수 없다는 뜻인 것 같았어요. 말하자면, 진실이 없다는 거죠. 저의 인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 아닐까 싶어요. 이 시나리오는 버려야 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한동안은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제가 공부엔 자신이 있었거든요. ‘나는 공부를 잘하는데 왜 시나리오를 쓰려고 여기에 왔지’ 싶었죠. 그래서 미술사나 예술사를 공부하려고 하기도 했어요. 시나리오를 너무 못 쓰니까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한다’고 마음먹거나 말하기조차 쑥스럽더라고요.”
휴학 후 떠난 어학연수가 의외의 전환점이 됐다.
-미국에서 어땠나요.
“정체성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죠.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한국어도 쓰지 않았죠. 꿈도 영어로 꿀 정도였어요. 이렇게 말하면 미국에 한 3년은 산 사람 같지만, 고작 3개월이었는데 그랬죠(웃음). 저를 둘러싼 모든 게 사라지고 하나만 남았어요, 시나리오.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나는 시나리오를 써야지만 한 인간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돌아와서 다시 쓰기 시작한 건가요.
“아침저녁으로 식탁 앞에서 시나리오만 썼어요.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글은 불편한 의자에서 잘 써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죠. 허리를 자기 힘으로 세워 앉아야 하는 의자요.”
자연스레 그의 작업실 의자들에 눈이 갔다. 이른바 ‘시스템’ 의자가 아닌 딱딱한 기본형 의자였다. 그 시절 식탁 앞에서 쓴 작품이 ‘나의 첫 시나리오’에 실린 ‘불쌍한 우리 아기’와 ‘대전 일기’다. 그는 ‘불쌍한 우리 아기’는 자신의 엑스레이 사진에, ‘대전 일기’는 스냅 사진에 빗댔다. 역시 엑스레이 사진이 다소 난해했다. 그렇지만 두 작품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여성이 주인공이며, 전형을 깨는 엄마가 등장한다는 것. 현재의 그가 쓰는 시나리오의 원형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작가 정서경의 눈으로 두 작품을 보면, 미진한 대목이 보이겠죠.
“미진한 정도가 아니라 영화가 될 수 없는 시나리오죠. 특히 ‘불쌍한 우리 아기’가 그래요. 시나리오는 (이 글이 영화가 돼서) 관객이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쓰거든요. 관객에게 익숙한 장치들이 있어야 이해가 되는 장르예요. 그런데 ‘불쌍한 우리 아기’는 그런 걸 하나도 넣지 않고 써보려고 했던 기억이 나요.”
-왜 그랬나요.
“다른 사람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생각하지 않고 썼거든요. 쓰고 나서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었죠. ‘내가 이걸 끝까지 다 쓰다니 대단하다. 내가 정말로 썼구나’ 싶었어요. 물론 단행본으로 발간돼 누군가가 볼 걸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저 자신한테는 그런 적이 없죠. 애초에 남한테 보여주려고 쓴 시나리오가 아니니까. ‘내가 나에게 보여주려고 이걸 썼어’라는 생각에 참 좋았어요.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죠.”
-엑스레이 사진보다는 스냅 사진인 ‘대전 일기’가 더 이해하기 쉽더라고요.
“처음으로 구조를 세워두고 쓴 시나리오죠. 실제 대전에 사는 사촌 동생들을 돌보러 간 적이 있기도 했고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간 뒤에 가장 마지막에 주인공의 서사가 나오죠. 결국 이것이 다 자신의 이야기였다는.”
-단편 ‘전기공들’도 보고 싶었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만약 있다면 찾아가서 파괴할 거예요. 제 것도 없앴지만, 혹시 누가 갖고 있다면 가서 망치로 VHS 테이프를 부술 용의도 있어요. 그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제가 실패한 일이 많네요. 다 잊어버리고 있던 거였어(웃음).”
‘전기공들’은 그의 유일한 연출작이다.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 지원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갖고 있던 테이프도 다 없앴다니.
“한예종 영상원을 졸업하려면 연출을 해야 했어요. 나중에 시나리오과가 없어지고 영화과가 됐거든요. 그래서 4학년까지 장편 시나리오만 쓰다가 단편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에 낸 거예요. (이스트만 단편영화 지원작으로) 당선이 돼서 지원도 엄청 받았죠. 그런데 저는 영화를 찍는다는 게 뭔지 전혀 몰랐어요.”
-어떻게 했나요.
“한예종 친구들에 다른 학교 출신들까지 훌륭한 스태프와 배우들을 모아서 영화를 찍었어요. 저만 문제였죠.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현장에서 다 저만 쳐다보는데 정말 무섭더라고요. 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화장실에 가서 이대로 저 창문 밖으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 영화 덕분에 그는 두 남자를 만났다. 박찬욱 감독과 남편이다. 박 감독은 이스트만 공모전의 심사위원이었고, 남편은 ‘전기공들’ 촬영을 도와주러 온 동국대 연극영화과 출신 스태프였다.
-그래도 ‘전기공들’ 시나리오를 보고 나중에 박찬욱 감독이 연락을 했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전기공들’을 보신 뒤에, 제가 졸업작품으로 쓴 두 작품도 구해서 보셨더라고요. 박 감독님은 ‘전기공들’을 좋아하셨어요. 언젠가는 스태프들하고 모여서 보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당황스러워하니까 ‘재미있는데, 왜’ 그러시더라고요.”
-박 감독의 연락을 받고서 어땠나요.
“그때 저는 박 감독님을 잘 알지 못했어요. 마침 ‘올드보이’가 한창 상영될 때인데 영화도 보지 않았고요. 감독님을 만나기 전날 하필 작업실에서 잔 거예요. 옷도 리본에 레이스가 달린 치마 같은 걸 입고 있었고요. 잠시 고민했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 것인가, 그 시간에 ‘올드보이’를 볼 것인가. 영화를 택했죠. 엄청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재미있는 영화를 찍는 감독이구나’ 했어요. 만나서 ‘영화 잘 봤습니다’라고 했죠(웃음). 그때 박 감독님은 지금의 박 감독님이 아니었어요. 칸영화제에서 상을 타기 전이기도 했고요. 그때 감독님이 제게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제안하셨죠.”
‘박찬욱 학교’에 입학한 순간이다.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있죠, ‘나는 박찬욱 감독 학교의 학생’이라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감독님을 만났으니까요. 박 감독님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원하는 게 뭔지 즉시 알아낸다는 거예요. 제가 시나리오를 써가면 그중에서 재미있는 건 바로 골라내시죠. 그렇지 않은 것엔 무관심이에요. 감독님은 제가 써간 여덟 개의 신(scene) 중에 한 신만이 괜찮아도,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식이었죠. ‘내가 너보다 잘 알아’라는 태도를 보인 적도 없고요. 뭘 어떻게 쓰라고 먼저 제시하시지도 않아요. 컨펌 속에서 자연스레 배워나가는 거죠. ‘아, 감독님은 이런 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하고. 좌절감이 들게 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끊임없이 다시 쓸 수 있었어요. 제가 지닌 장점을 잘 알아봐 주신 분이죠.”
한때 그와 박 감독은 컴퓨터 하드 디스크 하나에 모니터 두 대와 키보드 두 대를 각각 연결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뇌는 하나에 팔다리가 네 개’인 셈이었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관계였다면 불가능한 방식이다.
-‘박찬욱 학교’에서 배운 건 뭔가요.
“관성적으로 쓴 건 하나도 채택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모르는 채로 한 신, 한 신 써나갔죠. 마치 세상에 시나리오 쓰는 방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슷한 정신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떤 장르적인 클리셰와도 비슷하지 않은 걸 쓰자는 원칙을 공유하면서 써나간 거죠. 그런 ‘2인조 시나리오단’ 같았어요.”
그렇게 ‘친절한 금자씨’(2005)부터 시작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 ‘아가씨’(2016), ‘헤어질 결심’(2022)의 각본을 함께 썼다.
-영화 ‘아가씨’가 시나리오 작가로서 또 한번의 전환점이었을 것 같아요.
“많은 게 달라졌죠. 시나리오를 대하는 태도도, 쓰는 방식도요. 그때는 감독님과 마주 앉아서 함께 쓰기보다는 이메일로 주고받으면서 시나리오를 고쳐나갔어요.”
-어떤 것들이 달라졌나요.
“그즈음이 시나리오를 쓴 지 10년이 됐을 때예요.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게 있다는 걸 체감했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쓸 때만 해도 ‘내가 끝까지 쓸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도망가지 않고 완성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런데 ‘아가씨’ 때는 제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더라고요. 일단 내가 끝까지 쓸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알았어요. 또 내가 원하는 걸 쓸 수 있더라고요. 근육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느낌이었죠. ‘아가씨’는 사실 몇 번 거절하다 쓰게 된 작품인데, 쓰기 시작할 땐 어떻게 써야 할지 경로가 보이더라고요.”
한창 설명하던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저에게 실패가 있다면, 그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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