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 상담·택배 상하차는 없어져도 되는 노동인가...멸종 직업 체험기

입력
2024.06.21 14: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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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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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기관이 조사하는 '사라질 직업' 목록 상단에는 텔레마케터나 콜센터 상담원이 꼭 들어 간다. '전화하는 직업'이 다른 기술로 대체될 확률은 0.97~0.99에 이른다(1에 가까울수록 대체 가능성이 크다·LG경제연구원). 인공지능(AI)으로 인해 전화 상담원 대량 해고는 이미 현실이 됐다. 최근 한 대형 은행의 콜센터가 AI 상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상담원 200여 명을 해고했다.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이라는 부제를 단 책 '어떤 동사의 멸종'의 첫 번째 챕터에는 전화 상담노동의 끔찍함을 경험한 저자가 콜센터를 떠날 때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일자리는 그냥 사라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된 광경을 보니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없어져도 상관없는 것에, 없어지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는 무언가 때문에 사람들이 영하의 길거리에서 그것을 돌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을 리 없다."

저자 한승태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인 글쓰는 일을 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일했고, 일하면서 글을 썼"다. 꽃게잡이 배, 편의점과 주유소, 비닐하우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한 경험을 풀어 첫 책 '퀴닝'('인간의 조건' 개정판)을 썼고, 식용 동물 농장에서 일한 경험으로 쓴 두 번째 책 '고기로 태어나서'로 제59회 한국출판문화상(교양부문)을 받았다. 이번에는 '사라지는 직업'에 관해 썼다. 기술 발달로 대체될 직업 가운데 확률이 높은 네 가지의 마지막 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붙잡아두기 위해서다. 콜센터 상담(전화받다), 택배 상하차(운반하다), 뷔페식당 주방일(요리하다), 빌딩 청소(청소하다)까지.

한승태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승태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떤 동사의 멸종·한승태 지음·시대의창 발행·404쪽·1만8,500원

어떤 동사의 멸종·한승태 지음·시대의창 발행·404쪽·1만8,500원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길목에 당도한, 곧 사라질 직업 현장과 노동에 대한 핍진한 묘사를 따라가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유머가 있어 견딜 만하다. 콜센터를 불길한 기운이 풍기는 '아귀'에 비유한 대목에선 실소가 난다. "아귀는 바다 밑바닥에 엎드린 채 먹이가 입으로 들어오길 기다린다. 특별한 것은 먹잇감을 자신의 입 앞까지 유인하는 방식이다. 아귀에게는 기다란 가시가 돋친 등지느러미가 있다. 이 등지느러미의 첫 번째 가시는 안테나처럼 길게 늘어나 아귀의 입 위쪽에 끝을 드리운다. 끝부분은 주름진 피막으로 되어 있어 물결을 따라 흔들리면 작은 물고기처럼 보인다." 작은 물고기로 또 다른 작은 물고기를 사냥하는 아귀가 사라진 바다는 과연 좀 더 안전하고 아름다워질까.

직업이 사라진다는 건, 생계 수단이 사라진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던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특정 인간종의 마지막을 위한 헌사다.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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