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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폭군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집단적 자뻑'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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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열면 마주하게 될 첫 질문은 "우리는 왜 폭군에게 복종하는가"다. 16세기 프랑스 작가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자발적 예속에 관한 논설'에서 던져둔 질문이다. 이후 제법 많은 철학자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애쓰는 바람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질문이 됐다.
이 질문의 생명력은 '폭군' 자리에 다양한 얼굴이 들어간다는 데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북한의 김일성 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김정은 국무위원장, 윤석열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가수 김호중, 민희진 어도어 대표 등 자신의 세계관과 취향에 따라 골라 넣으면 된다.
대답은 일부 제출돼 있다. 가까운 걸로는 철학자 한병철이 낸 '정보의 지배'(김영사 발행)에 있다. 한병철은 지금의 사회가 디스토피아라면 그것은 조지 오웰의 '1984'가 아니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쪽에 가깝다고 했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요컨대 오웰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기자인 이졸데 카림이 쓴 '나르시시즘의 고통'은 이런 설명들이 조금 못마땅하다. 16세기 라 보에시가 던진 질문의 포인트는 예속은 예속인데 '자발적'이라는, 그러니까 주체적 선택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앞서의 논의들은 '자발적' 운운하다가도 자꾸 '누군가의 통제' 쪽으로, 그러니까 음모론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자기 책을 사서 읽고 공감해줄 사람들을 '폭군의 공범'으로 만드느니 '폭군의 피해자'로 남겨두는 게 아무래도 남는 장사이고, 또 마음 편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자발성' 그 자체를 파고드는데, 그 키워드는 '나르시시즘'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잘생긴 목동 나르시스는 그를 짝사랑하는 에코의 간절한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물에 비친 잘생긴 제 얼굴만 바라보다 그만 물에 빠져 죽는다. 찰랑대는 물결에 지워지곤 하는 물속에 비친 나, 그 절대적으로 이상화된 나에게 매혹돼 자꾸 들여다보려 한 결과다. '절대적으로 이상화된 나'를 저자는 '자아 이상(Ich Ideal)'이라 부른다. 나르시시즘, 자기애, 혹은 더 날것 그대로의 표현인 '자뻑'은 이 자아 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 그리고 자아 이상과 "일치하지 않지만 실현하려는" 행위를 불러온다.
이건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서 전진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언제나 문제는 수준과 정도에 있다. 그 결과 자기애성 성격장애 진단, 그러니까 '자뻑'이 심한 사람은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생각한다, 성공이나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나는 특별하고 그런 나는 특별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인관계가 착취적이다, 거만하고 오만방자하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한다 등등. 이미 머릿속에서 몇몇 얼굴이 지나갔을 터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개인적 기질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르시시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옛날과 달리 개인의 정체성과 자존감, 자신감을 부추겨주는 문화, 나르시스가 스스로를 비춰 볼 물에 비견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광범위한 확산 등이 영향을 끼쳤다. 저자는 이 나르시시즘 공동체를 1960년대 대항문화 청년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망-방황-약속' 모델로 설명한다. 이 썩어 빠진 세상 속에서 순수한 우리만 빠져나와 온전한 기쁨을 누리리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공동체의 특징을 일찍이 프로이트는 "노골적 반감", "사소한 차이의 나르시시즘"이라고 정리했다. "아무리 미미한 차이라 해도 근본적인 비판과 의심의 대상"이 된다. 앞장서서 당신을 거부하겠노라 괴성을 지르는 일이 제일 멋진 세상이 됐다. 그래서 나르시시즘 공동체의 정점에는 대개 폭군이 존재하고, 그 폭군은 그렇게 자발적 예속을 누리게 된다. 팬덤정치, 팬덤문화 등 현대사회 여러 병폐에 대한 좋은 분석이다.
참, 저자는 그래서 탈출구가 있다고 볼까. 저자는 막판에 이런저런 해법을 모색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듯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에게 남은 건 나르시시즘의 이데올로기가 막다른 골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저자 스스로 나르시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던 에코가 돼보겠다고 자임한 셈인데, 이 '21세기의 에코' 또한 목소리로만 남을지는 우리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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