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체험 통해 기억하는 5·18 민주화운동

입력
2024.06.08 04:30
24면

<171> 기록 없는 시민군 일원, 5·18 폭력 피해 여성

지정남의 오월 1인극 '환생굿' 극중 사진. 지정남커뮤니케이션 제공

지정남의 오월 1인극 '환생굿' 극중 사진. 지정남커뮤니케이션 제공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 지난달 어느 주말, 예매해 둔 공연을 보러 집을 나섰다. '지정남의 오월 1인극 환생굿'(이하 '환생굿')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은 광주를 거점으로 다양한 공연, 방송, 사회 활동을 해 온 배우 지정남씨가 기획, 극작, 연출, 연기를 모두 도맡은 1인극이다. 15년 전 이숙경 감독이 연출한 영화 '어떤 개인 날'에서 인상 깊다는 얘기로는 부족한 연기를 보여 준 배우의 에너지를 기억하던 터라 그녀가 펼쳐 보일 오월 광주는 어떨지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극장에 들어섰다.

‘잘린 젖가슴’으로 기억된 5·18

나의 세대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 나 또한 대학에 와서 5·18이라는 사건의 전모와 실체를 알게 되었다. 전혀 몰랐던 일은 아니었다. 나고 자란 지역에서는 그해 광주에서의 ‘험한 일’에 대한 수군거림과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비하가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다만 그런 말들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해졌다.

그러나 5·18 당시 국가 폭력을 재현한 사진, 노래, 영화는 또 다른 불편함과 질문을 안겨주었다. 예를 들면 5월마다 교정에서 자주 불렸던 노랫말은 이랬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오월의 노래' 중

‘젖가슴’ 운운하는 가사는 부르기는커녕 듣기도 싫어서 중간에 눈을 감곤 했다. 그런 폭력을 행한 군부독재 그리고 시민 피해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보다는 노래 자체가 폭력으로 느껴져 더 이상 사고가 진전되지 않았다. 이후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느낌’이 여성의 몸에 행해진 폭력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폭력을 당한 여성의 몸을 전시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수단으로만 삼는 데 대한 분노이자 질문이라고 정리하게 됐다.

'환생굿'은 5·18 당시 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성을 몸이 아니라 존재로 소환한다. 모두 여성 3명이 등장하는데 ‘초짜 무당’ 고만자, 첫 번째 환생굿 의뢰자 오뚜기식당 사장 김윤희, 김윤희가 환생을 의뢰한 변미화가 바로 그들이다. 1인극답게 배우는 이 모든 인물을 연기하는데 이 과정 자체가 곧 김윤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는 고만자의 굿이자 변미화의 환생이 어우러진 굿판이다. 공연은 곧 굿이 되고, 관객은 곧 굿판의 참여자가 된다.

사라진 이들이여, 이 환생길로 어서 바삐 나리소사

환생굿 의뢰자 김윤희는 5·18 당시 ‘술집 여성’으로 일하다 참여하게 된 이다. 그곳에서 만난 변미화는 한참 나이 어린 이였지만 함께 주먹밥을 만들고 헌혈도 하며 시민군의 일원으로 도청을 지켰다.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 후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함께 갇힌 이들은 그곳에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모진 일’을 겪고 풀려난다. 풀려난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김윤희와 변미화처럼 대부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변미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윤희는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에 환생굿을 청한 것이다.

김윤희와 변미화는 5·18 항쟁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와 사연을 대변한다. 특히 ‘술집 여성들’에 대해서는 5·18에 대한 남성 작가와 교수들의 초기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에서 이 여성들은 주체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남성-주체적 참여자의 보조자이며 ‘성스러운 항쟁’이라는 이미지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다. 1999년 출판된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최정운 교수는 5·18 항쟁을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가 된 절대공동체’로 보았는데 ‘술집 여성들’의 합류는 절대공동체의 증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시민들은 남녀노소, 각계각층, 특히 예상치 못했던 계층의 사람들, 예를 들어 황금동 술집 아가씨들, 대인동 사창가 여인들이 공동체에 합류하는 모습에 환희를 느꼈다"고 썼다.

하지만 '환생굿'에서 김윤희는 "공동체에 합류해 시민들에게 환희를 준" 어떤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녀는 온갖 종류의 노동으로 시민군 공동체가 돌아갈 수 있게 한 시민군의 일원, 그러한 죄로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한 피해자, 그러고도 '술집 여자'라는 이유로 '밥만 해 줬겠냐, 몸도 대 줬겠지'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자신이 한 일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라는 구체적 존재로 등장한다.

변미화 또한 마찬가지다. 남성 엘리트들이나 지역 명망가들의 기록 및 회고에서 '교복 입은 여고생'으로 등장하는 어린 여성 중에는 학생도 있었지만 버스 차장이나 노동자도 많았다. 당시 작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젊은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존재며 했던 일은 공식 기록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여성들은 시민군이 지키고자 했던 이들 내지는 보조자로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5· 18 민주화 운동 당시 운집한 시민 속 여성들. SBS 특집 다큐멘터리 '그녀의 이름은' 예고편 캡처.

5· 18 민주화 운동 당시 운집한 시민 속 여성들. SBS 특집 다큐멘터리 '그녀의 이름은' 예고편 캡처.

'환생굿'에서 김윤희는 변미화를 불러내고자 하지만 변미화는 환생을 거부한다. 제대로 꼬여버린 인생의 굴곡을 혼자 헤쳐 가면서 결국 건물 청소 일을 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녀는 넋이라도 위로하고자 하는 김윤희의 소망마저 뿌리칠 정도로 80년 '그 일'을 징글징글해한다. 이제 공연-굿은 최선을 다해 '의뢰'를 성사시키고자 하는 고만자, 변미화를 불러내어 변미화와 자신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한풀이하고자 하는 김윤희, 더 이상 이승에 미련 갖고 싶지 않은 변미화 간의 입씨름, 눈물, 한탄을 거치며 고조된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고만자를 도와 변미화를 불러내는 데 동참하는 굿판 참여자가 되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김윤희와 변미화로 대표되는, 5·18 항쟁의 사라진 수많은 여성들이 우리 곁으로 다시 오는 '환생'의 과정이다.

공연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부른다. 5·18 항쟁과 세월호가 바로 등치될 수 있는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시민에 대한 폭력과 방치, 이후 피해자들에 대한 낙인화 과정이 보여주는 유사성은 한국에서 되풀이되어 온 어떤 잔인성의 체제를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이 잔인성의 체제에서 각자 삶을 견뎌온 관객들이 집단 애도를 통해 묵은 마음을 해소한 순간은 공연-굿이 실은 산 자들을 위해 필요한 의례임을 새삼스럽게 상기시켰다.

공연-굿이 끝난 후 이어지는 삶

'광주, 여성–그녀들의 가슴에 묻어둔 5·18 이야기'(2012·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기획)

'광주, 여성–그녀들의 가슴에 묻어둔 5·18 이야기'(2012·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기획)

광주 여성들은 진작부터 5·18 민주화운동 기록과 제도화의 남성 중심성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1991년 5월 여성연구회가 쓴 '광주민중항쟁과 여성', 2012년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이 기획해 출판한 '광주, 여성 –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둔 5·18 이야기'가 대표적 사례다. 한편 5·18에 참여한 다양한 여성들은 여러 경로로 자신의 경험을, 이후의 삶에서 찍힌 낙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 온 삶을 증언해왔다. 그 이야기들은 발화 당시에는 제대로 들어주는 이 없이 묻히는 듯했지만 2015년 페미니즘 대중화, 2018년 미투 이후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4년간 조사 활동 끝에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조사 보고서가 우리 곁에 도착했다.(한국일보 5월 30일 자 기사 '이진희의 동행: 윤경회 5·18민주화운동조사위 성폭력 사건 조사 책임자')

물론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냥 잊자는 말은 무책임하다. 증언자들은 한결같이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섰노라고 말한다.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은, 그들의 삶을 사회 공동체 내에서 다시 되살리는 일종의 '환생'이며, 지금 산 자들과 앞으로 올 자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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