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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는 도와도 권력에는 영합하지 않은 학자

입력
2024.05.1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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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아치볼드 콕스

1973년 6월 워터게이트 기자회견장의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 위키피디아

1973년 6월 워터게이트 기자회견장의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 위키피디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 1912.5.17~2004.5.29)는 대통령의 불법행위와 권력 남용에 맞서 진실과 민주주의를 지켜낸 인물이다. 그는 교수가 학교를 떠나 정부에서 일하게 될 때 지켜야 할 윤리와 원칙을 삶으로 보여준 학자이기도 했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우등 졸업한 그는 2차대전 전시 법무부 송무차관실에서 근무한 인연 덕에 로펌보다 연방정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민주당 지지자로서 상원시절 존 F. 케네디의 연설문 담당관과 고문으로 일했고 대선 선거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1945년 하버드 로스쿨(노동법, 헌법) 교수가 됐다.

1952년 해리 트루먼 민주당 정부는 그를 연방임금안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위원회의 최저임금 조정안을 거부하자 4개월 만에 사임했다. 그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지면 언제든 정부 요청에 응했고 일이 끝나면 미련 없이 학교로 복귀하곤 했다.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리처드 닉슨은 법무장관 등 고위 공직자 다수를 희생양 삼아 잇달아 해임한 뒤 신임 장관 엘리엇 리처드슨(Elliot Richardson, 1920~1999)을 임명하며 “적절하다고 판단될 경우 특별검사를 임명할 권한”을 부여했다. 민주당 다수 상원 법사위는 특검 임명을 조건으로 리처드슨을 인준했고, 그는 하버드 동문 선배이자 친구인 콕스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콕스는 백악관의 부정과 불법 혐의를 가차 없이 조사한 뒤 닉슨의 백악관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 닉슨은 거부했고 자기에게 맞서던 리처드슨과 차관(사임)을 잇달아 해임했다. 콕스는 법무부 3인자인 송무차관에 의해 10월 해임됐고, 다시 하버드대로 복귀했다. 그는 1984년 하버드대 정년 후 보스턴대 종신교수가 됐고, 공익법률로비단체 커먼코즈 의장(1980~92)으로도 일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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