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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울리는 '장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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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헌부. 어릴 적 친구 이름이다. 그런데 성씨는 물론 실명인지도 알 수 없다. 몸집이 크고 지능이 좀 낮은 그 아이를 동네에선 애나 어른이나 “헌부야” 하고 불렀다. 형이랑 둘이 살면서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헌부는 이 집 저 집 다니며 마당도 쓸고 닭 모이도 주는 등 허드렛일을 도왔다.
헌부와 친구가 된 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봄 무렵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남자애들한테 둘러싸여 놀림당하는 헌부를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곤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 동생 다섯 남매가 그곳으로 가서 놀려대던 아이들을 혼내줬다.
그날 이후 나보다 대여섯 살은 더 먹었을 헌부는 내 친구들하고 놀았다. 무거운 몸을 띄워 고무줄놀이를 했고, 몸을 반 이상 내놓아 금세 걸리는 숨바꼭질도 함께했다. 제대로 숨으라는 내 호통에 눈을 끔뻑거리며 환하게 웃던 헌부의 얼굴이 선하다.
새로 지어진 학교로 전학 가면서 그 아이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도 70여 명이 복작대던 ‘콩나물 교실’을 떠난 기쁨에 취해 있었다. 새 학교 새 교실에서 새 친구들과 노는 데 팔려 헌부는 까맣게 잊었다.
40년도 훨씬 더 지나 헌부가 떠오른 건 이달 초 강원 산골에서 발생한 지적장애인 성폭행 사건의 항소심 선고 기사 때문이었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선 여전히 장애인을 함부로 대하는 분위기가 느껴져 한숨이 나왔다. 반편이 귀머거리 벙어리 봉사 절름발이 등 가슴에 대못이 될 만한 말들이 날아다녔던 시절을 헌부는 어떻게 살아냈을까.
말은 중요하다. 무심코 쓰는 말에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장애우가 그렇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닌 ‘친근한 벗’으로 생각하자는 뜻에서 한때 이 말은 널리 쓰였다. 그런데 장애우는 결코 장애인을 위하는 말이 아니다.
장애우는 말 그대로 ‘장애가 있는 친구’다. 열 살 초등학생이 장애를 가진 80대 어르신에게 “친구야” 하고 부를 수도 있는 셈이다. 이보다 더 버릇없는 일이 있을까. 예의에 크게 벗어난 말이다.
게다가 장애우엔 비주체적 사람의 뜻이 담겨 있다. 집단을 칭하는 말은 1·2·3인칭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자·남자·사회인·노동자처럼. 그런데 장애우는 타인이 지칭할 때에만 쓸 수 있다. 내가 나를 “친구”라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인, 장애인과 대립하는 말은 비장애인이다. 모레인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포용하는 분위기는 말에서 시작된다. 하루 법석을 떤다고 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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