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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네 개라고 기죽을 거 없잖아?"...어느 풀벌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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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그림꿈’은 생김새부터 심상치 않다. 사극에서 보던 ‘옛날 책’을 닮았다. 책 옆면에 으레 있는 책등이 없어 종이와 종이를 엮은 실이 드러나 있다. 두꺼운 표지에는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다. 낯선 형태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구멍은 독자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가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책에는 자꾸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풀벌레가 나온다. 풀벌레는 힘겨워한다. “애고고고고 사람이라는 거, 참 어렵다.” 이유는 ‘다리’가 네 개(팔 두 개, 다리 두 개)여서다. 그런데 꿈과 현실, 풀벌레와 사람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 풀벌레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건지 사람이 풀벌레가 되는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던 장자의 ‘호접몽’과 비슷하다. 식물들도 윤곽선 없이 번진 듯한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이 경계 없는 세계에서도 비교적 명징해 보이는 것은 있다. 기이한 꿈 때문에 입맛이 없을 때 함께 수박을 먹으며 얘기 나눌 친구 한 명으로도 삶은 꽤 괜찮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고작 다리 네 개로 너무 많은 것에 짓눌려 살 필요는 없다는 것.
이 작품은 서현 작가가 풀과 곤충을 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다가 떠올린 이야기라고 한다. 최근 ‘호랭떡집’으로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한 그의 새 작품이다. ‘간질간질’ ‘커졌다’ 등 작가의 이전 작품을 본 독자들은 조금 놀랄 수도 있다. 화려한 색감과 깨알 같은 유머로 지면을 빈틈없이 채우며 경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던 그가 이번엔 최소한의 색깔과 그림, 최대한의 여백으로 느리고 조용하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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