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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여행 곗돈 천만 원을 ‘보이스피싱’으로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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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소, 정.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윤'과 '소'와 '정'이라는 세 친구다. 열두 살 겨울에 대형 입시학원의 버스에서 만나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된 이후에도 매년 함께 가는 여행을 거르지 않던 이들이지만, 늘 회계를 맡던 정이 서른 살을 기념해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려 모아 둔 1,000만 원을 보이스피싱을 당해 날려버리며 관계의 틈이 벌어진다.
윤과 소는 “그 돈 없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다” “여행 못 간다고 안 죽어. 우린 괜찮아”라고 위로하나 정은 자책하고 “셋은 그 이후로 함께 여행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거리를 두던 정이 5년 만에 나타나 윤과 소를 초대하며 성혜령 작가의 단편소설 ‘윤 소 정’은 시작된다.
여덟 편의 작품이 실린 성 작가의 첫 소설집 ‘버섯 농장’에는 현실에서 맞닥뜨릴 만한 문제로 곤경에 빠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친구들과의 여행 곗돈을 잃어버리거나 휴대폰 명의도용 사기에 당하고(‘버섯 농장’) 생각 없이 피운 회사 기숙사 룸메이트의 담배가 마약으로 밝혀져 수백만 원을 내줘야 하는 처지에 몰리기도 한다(‘주말부부’).
성 작가는 일상 속 갑작스러운 파국과 공포를 그리는 까닭에 대해 “기본적으로 불안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다”라는 답을 한국일보에 내놨다. “지금의 삶, 매일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가족과 밥을 먹는 삶을 매우 운 좋게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이, 일상이 얼마나 쉽게 망가지는지 알고 있으니까”라는 것이다.
성 작가가 소설집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지금까지 왜 소설을 쓰게 되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아팠다고. 열일곱 살 때 다리에 암이 생겼고 그 후로 열 시간이 넘는 수술을 세 번을 받았다”라고 밝힌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소설집에서 성 작가는 일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이탈하기 쉬운 환상인지를 건조하게 서술한다. 소설 ‘물가’에서 ‘나’는 임신한 친구 ‘유안’에게 “너는 안전하고 좋은 세계에서 살고 있고 태어날 아이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지하철역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서서 일하는 ‘나’와 달리 유안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직업을 가져 “샌드위치에 오이를 잘못 넣었다는 이유로 몇 번을 고개 숙여 사과할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그러나 태어난 유안의 아이는 항암치료를 받게 되고, 반려견을 원룸에 사는 ‘나’에게 맡겨야 할 상황에 내몰린다.
그럼에도 성 작가의 소설은 ‘현실적’이라는 수사와는 거리를 둔다. 중국 저가 의류를 비싸게 파는 인터넷 쇼핑몰이나 쇠락한 위성도시 외곽의 페인트 공장, 지방 공공기관 연구소 등 분명히 세상 어딘가에 있을 이야기의 배경조차 현실보다는 연극의 무대 같은 가상의 공간처럼 묘사한다. 등장인물의 이름마저도 ‘남미’ ‘조오’ ‘보정’ 등으로 묘하게 낯설다. 이처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경계, 혹은 제3의 어딘가에 서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는 가깝기 그지없는 관계에서도 서로에게 닿지 않고 엇나가며 긴장의 수위를 끌어올린다.
김숨 소설가로부터 “정교하다, 팽팽하다, 흥미진진하다, 담담히 집요하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높은 소설의 밀도는 다가올 이야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책장을 넘기는 손을 머뭇거리게 한다. 그러다가도 궁금증을 못 이겨 결국 슬그머니 다음 장을 펼치게 되는 힘을 지닌 작품들이다. 성 작가는 “인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마음 졸이지만, 결말이 있다는 데서 오는 묘한 안도감.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제 삶에도 어떤 매듭들이 생기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성 작가는 2021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후 2023년 젊은작가상, 2024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으며 자신만의 하드보일드한 세계를 구축했다. “현재를 단일한 결론에 묶어두지 않음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개방하는”(한영인 문학평론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선보인 성 작가는 말했다. “제가 쓴 이야기를 완벽하게 알고 있지도 않고, 인물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도 못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모순되는 부분들을 발견하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그 빈 부분들은 이제 독자분들께 온전히 내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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