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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게 고집 피우는 '미운 세 살'도 호르몬 탓?

입력
2024.04.13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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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내분비내과 의사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
생후 6개월쯤 성 호르몬이 폭증하는
'소(小)사춘기' 시기에 주목

북유럽 완구유통업체 탑토이가 젠더 중립을 반영해 만든 제품 카탈로그. 탑토이 홈페이지

북유럽 완구유통업체 탑토이가 젠더 중립을 반영해 만든 제품 카탈로그. 탑토이 홈페이지


페미니스트임을 자부하는 엄마, 아빠로서 내 아이에게 올바른 성평등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젠더 중립'의 길을 모색한 이들은 대부분 좌절을 맛본다. 정말 갓난아기 때부터 남자아이는 차에, 여자아이는 인형에 더 관심을 보인다. 부모가 장난감을 거꾸로 쥐어줘 봐야 조금 더 자란 남자아이는 뛰어다니며 총 쏘는 걸, 여자아이들은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걸 좀 더 선호한다.

우리 부부가 뭔가 허점을 보인 게 아닐까. 아니면 부부 수준에서 아무리 조심해도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를 다 가릴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에게든, 이 사회에든 분노할 필요는 없다.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를 쓴 네덜란드의 20년 차 내분비 전문의 막스 니우도르프는 그걸 '소(小)사춘기'라는 말로 풀어낸다. 10대 중반, 아니 10대 초반부터 찾아온다는 사춘기 말고 또 다른, 그에 훨씬 앞선 '작은 사춘기'가 있단 말인가.


생후 1주일 '작은 사춘기'가 온다

1977년 미국 의사 로절린 앨로는 혈액 내 특정 물질 추적법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학자들은 이 기법을 이용해 다양한 호르몬 추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뇌와 성기의 상호작용이 아주 어린 나이, 즉 생후 일주일부터 약 2세 사이에 벌써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춘기 훨씬 이전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무렵, 그 조그만 아이의 몸에서 다 큰 성인 남성과 여성 수준으로까지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라디올이 급격히 분출하는 '호르몬 폭풍' 현상이 관찰되더란 얘기다.

인체에 위치한 호르몬 분비샘. 이 작은 분비샘에서 나오는 호르몬이 인간의 사고 행동 패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크로스 제공

인체에 위치한 호르몬 분비샘. 이 작은 분비샘에서 나오는 호르몬이 인간의 사고 행동 패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크로스 제공


이 호르몬 폭풍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내기엔 신경계와 다른 기관들이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갓난아기 얼굴에 갑자기 수염이 나거나, 가슴이 불룩 솟는 등 2차 성징 같은 본격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개 생후 6개월쯤 호르몬 농도가 정점을 찍고 차츰 안정된다. 4~10세 기간은 보통 '안정기'로 분류된다. 이 과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아직 잘 모른다. 사춘기를 예비한, 혹은 성별을 완전히 확정 짓는, 아니면 태어난 직후 온몸을 한 번 풀어주는 일종의 시험주행 같은 게 아닐까 추정만 할 뿐이다.


'미운 세 살' 작은 사춘기 때문일 수도

여러 실험 관찰 결과를 보면 호르몬 폭풍은 당연히 사고방식, 행동방식에도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친다. 말도 안 되게 제 고집 피우는, 흔히 말하는 '미운 세 살'도 이때의 호르몬 폭풍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남자아이들이 주변 지역을 탐색하고, 여자아이들이 방에서 재잘대며 노는 경향은 다름 아닌 호르몬에 기초한 것일 수 있다." 자폐증은 흔히 '지나치게 남성화된 뇌'가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이는 호르몬 폭풍 시기 테스토스테론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된 영향일 수도 있다.

젠더 정치는 이 시대 주요 이슈 중 하나다. 게티이미지뱅크

젠더 정치는 이 시대 주요 이슈 중 하나다. 게티이미지뱅크


페미니즘이 큰 응원을 받으면서 섹스(Sex), 즉 자연적 성별을 넘어 사회적 성별을 뜻하는 젠더(Gender)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오랜 세월 당해만 온 게 억울해 여성에게 주어진 성별 역할, 기대, 특성 같은 것들은 그저 사회적으로 구성됐을 뿐이란 목소리가 힘을 얻었고, 이 주장은 곧 사회적으로 구성됐으니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뜯어 고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섹스가 다리 사이에 있다면 젠더는 귀 사이에 있다'는 말도 있다.


작은 사춘기, 전문가도 잘 모른다

그런데 귀에다 젠더를 아무리 속삭여도 인간도 동물인 이상, 섹스의 범주를 아예 넘어서는 젠더가 마냥 가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해는 말길. 이런 얘기들은 의학적 평균의 관점에서 나온 얘기다. 인간 존재의 다양성이나 젠더와 페미니즘,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동성애, 트랜스젠더, 성전환 같은 주제를 편견 없이 다뤘고, 여성의 몸을 남성의 '라이트 버전'으로 간주해 온 기성 의학에 대한 익숙한 비판도 해뒀다. 무엇보다 개체와 환경 간 상호작용의 원인이자 과정이자 결과인 호르몬은 이게 이거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를 쓴 네덜란드 의사 막스 니우도르프. 어크로스 제공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를 쓴 네덜란드 의사 막스 니우도르프. 어크로스 제공

이 책 자체는 사실 아이 있는 집의 필독서라 불리는 '삐뽀삐뽀 119' 느낌이다. 한 사람의 일생과 호르몬 간의 상호작용 문제를 대중적 눈높이에서 다뤘다. 아이들 키와 관련된 성장 호르몬, 비만을 막는 호르몬, 중장년과 노년기에 알아둘 만한 갱년기와 장수 호르몬 문제 등 평소 궁금했던 이야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책 전반에 걸친 소사춘기 이야기가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하나다. 저자는 "과학문헌에서 사춘기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소사춘기) 관련 글은 3%도 채 안 된다"고 해뒀다.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만큼 덜 알려져 있다는 얘기다. 아직 모르는 게 많다.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막스 니우도르프 지음·배명자 옮김·어크로스 발행·472쪽·2만2,000원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막스 니우도르프 지음·배명자 옮김·어크로스 발행·472쪽·2만2,000원


조태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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