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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음향으로 구현한 칼로 살 베는 감각...60대 킬러의 무대 위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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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여성, 노인, 킬러. 세 단어의 조합은 어색하다. 여전히 여성은 사회의 약자이다. 노인은 경륜과 경험은 쌓였지만 신체 활동에 제약이 많다. 뮤지컬 '파과'의 주인공은 65세의 여성 킬러 조각(차지연·구원영)이다. 나이 든 여성 킬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2013년 출간된 구병모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개의 플롯으로 전개된다. 우선 조각의 이야기. 65세 킬러 조각은 실력도 녹슬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아 가까스로 킬러 임무를 수행한다.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수했던 원칙도 저버렸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고 폐지 수집 노인을 돕다 암살 대상을 놓친다. 결정적으로 자신을 도와준 자식뻘 되는 다정한 의사 강 박사에게 설렘을 느낀다.
또 하나의 플롯은 젊은 킬러 투우(신성록·김재욱·노윤)의 이야기다. 투우의 아버지를 조각이 암살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지만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조각의 실력에 매료된다. 모성애마저 느낀다. 킬러가 된 투우는 조각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조각은 늙고 감정적으로 변해 있다. 투우는 조각을 자극해 킬러 본능을 일깨운다.
세 번째 플롯은 어린 조각(유주혜·이재림)의 이야기다. 부모와 친척집에서 내쫓기듯 나와 거리를 배회하던 어린 조각은 클럽을 운영하는 류(지현준·최재웅)의 집안일을 돕게 된다. 조각의 킬러 잠재력을 발견한 류는 혹독하게 훈련시켜 킬러로 키워 낸다. 조각에게 류는 유일한 가족이었고 지켜야 할 것이었다. 류는 조각 대신 죽음을 맞는다.
세 개의 이야기는 조각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재구성된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가 펼쳐지다 보니 단조로움을 피했으나 성인 조각의 이야기로 집중되는 힘은 약하다. 어린 조각의 일화는 중심 플롯인 성인 조각의 이야기를 부연하기보다는 별개의 이야기로 평행적으로 진행된다. 음악은 도드라지지 않고 다소 많은 듯하다.
그럼에도 뮤지컬 '파과'는 매력이 또렷하다. 무대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누아르 장르의 긴장과 액션을 제대로 맛보게 한다. 칼과 총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킬러들의 간결하면서도 역동적인 결투 장면이 압권이다. 시작부터 살을 파고드는 칼날의 느낌을 음향과 조명으로 전한다. 치밀한 액션 구성과 안무, 화려한 조명, 배우들의 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액션으로 무대만의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어린 조각의 격렬한 대결 장면이나 조각이 일당을 하나씩 잠재우고 투우에게 찾아가는 하이라이트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뮤지컬 무대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이미지를 선보이는 연출가 이지나의 장기가 제대로 구현됐다.
원작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킬러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드러낸다. 뮤지컬에서도 조각의 내레이션으로 이끌어 가는 장면이 많다. 조각의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을 녹음된 내레이션으로 표현해 작품 자체가 조각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느낌을 준다. 결투 장면에서도 공격과 방어의 의도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데, 역동적인 액션 장면을 정적인 내레이션으로 풀어낸 장면은 이색적이다.
킬러로서 은퇴할 나이에 조각은 지켜야 할 것을 갖게 되고, 그걸 지켜내면서 새로운 삶을 경험한다. '파과'는 흠집 난 과일(破果)이면서 16세 소녀(破瓜)도 의미한다. 뭉그러진 과일에서 연초록의 싹을 틔우는 이야기인 셈이다. 누아르 장르의 긴장, 조명·음향·안무로 이뤄진 액션, 그리고 휴머니즘 짙은 이야기가 뮤지컬에서 자주 경험하지 못한 재미를 준다. 올해 5월 26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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