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뮤지컬이 된 베스트셀러 동화 '긴긴밤'...10평짜리 작은 무대가 슬픔과 감동으로 가득 찬다

입력
2024.10.23 14:21
수정
2024.10.23 14:31
19면

[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루리 동화 원작 뮤지컬 '긴긴밤' 리뷰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뮤지컬 '긴긴밤'.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뮤지컬 '긴긴밤'.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뜨겁고 황량한 사막을 지나, 어디에 있을지 모를 바다를 찾아 어린 펭귄과 다리를 다친 흰바위코뿔소 노든이 걸어간다. 이들이 죽음과 이별, 숱한 위험이 도사리는 여정을 수많은 긴긴밤을 보내며 이어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다가 주는 희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뮤지컬 '긴긴밤'(양소영 작·박보윤 곡·황희원 연출)은 바다를 향해 끝없는 길을 걷는 어린 펭귄과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다. 2021년 발간돼 선풍적 인기를 얻은 루리 작가의, 같은 제목의 장편동화가 원작이다. 서정적 그림과 감동적 이야기를 담은 동화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과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의 엄숙함을 담았다'는 평을 받았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이지만 죽음과 이별, 전쟁 등 현실의 아픔을 다룬다. 그러면서도 온기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작품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의 사연으로부터 시작한다. 코끼리들 사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노든은 자기를 찾기 위해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나간다. 그곳에서 바람보다 더 빨리 달리는 코뿔소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낳지만 인간의 탐욕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동물원에 갇힌다.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그를 위로하는 친구 흰바위코뿔소 앙가부를 만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시,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줬던 앙가부를 먼저 떠나보내고, 짝을 잃고 버려진 알을 보살피던 펭귄 치쿠와 동물원을 탈출해 방랑의 길을 걷는다.

쉬지 않고 떠드는 '불평쟁이'였지만 마음 따뜻하고 좋은 아빠였던 치쿠도 세상을 떠나, 노든 곁에는 치쿠의 부탁으로 맡게 된 펭귄알만 남겨진다. 알은 치쿠처럼 수다스럽고 귀여운 어린 펭귄으로 부화한다. 노든은 치쿠의 부탁대로 어린 펭귄을 바다에 데려다주기 위한 길을 나선다. 긴긴밤을 새우며 걷는 그 길은 수많은 고난과 아픔이 매복돼 있지만 곳곳에 반짝이는 별들의 순간이 있어 하루를 버텨낸다.

어둡고 아프지만 감동적인 무대

뮤지컬 '긴긴밤'.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뮤지컬 '긴긴밤'.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뮤지컬은 원작 동화의 서사를 대학로 작은 소극장 무대에 영리하게 담아낸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바다 같은 거대한 호수, 뜨거운 사막, 그리고 광활한 바다. 작품 속 무수한 공간은 무대적 상상력으로 10평 남짓 공간에서도 어색함 없이 펼쳐진다. 무대 바닥엔 네모 패널들이 펼쳐져 있는데 상황에 따라 조명을 달리하며 좁은 공간을 다양한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흰바위코뿔소와 아프리카 펭귄, 코끼리 등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동물들이 등장인물이지만 스펙터클한 무대 장치나 인형, 영상 등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코뿔과 여행가방, 앞뒤의 길이가 다른 흰 웃옷, 그리고 긴 호스만 있으면 코뿔소와 펭귄, 코끼리를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관객의 상상력을 더해 그 어떤 기술적 무대 장치 없이 동화 속 장면을 훌륭히 구현해냈다. 좁은 공간에서 단순한 의상과 소품, 서사에 따라 세밀하게 변하는 조명, 그리고 잘 짜여진 연출로 무대예술만의 매력을 보여줬다. 특히 주제를 암시하는 음악 ‘바람보다 빠르게’는 귀에 남는 멜로디가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들판과 바다를 힘껏 달리며 느끼는 자유를 관객들에게 전한다.

동화이지만 어둡고 아픈 순간이 많다. 이들이 어둡고 내일을 알 수 없는 길을 긴긴밤을 지새우며 걸어갈 수 있던 것은 거친 숨을 받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악몽을 꿀 때 걱정해 주는 존재가 옆에 있기 때문이다. 동화 '긴긴밤'이, 그리고 뮤지컬 '긴긴밤'이 죽음과 현실의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죽음보다 삶을, 혼자가 아닌 함께의 가치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코뿔소 노든 곁에는 자신을 받아준 코끼리들이, 아내와 자식이, 친구 앙가부가, 수다스러운 치쿠가, 그리고 어린 펭귄이 함께 있다. 어린 펭귄은 노든과 헤어지며 "노든은 훌륭한 펭귄이에요"라는 말을 남긴다. '함께'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슬프지만 감동적인 뮤지컬 '긴긴밤'은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2관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