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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포기할 때 의사의 명예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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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달에 한 번씩 서울 시내에 있는 가정의학과 의원에 간다. 작년 이맘때 배에 가스가 자주 차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증상이 반복돼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곳이다.
이곳 A원장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 독소 제거, 장내세균 밸런스 회복, 적절한 영양 공급, 생활습관 개선 등의 기능의학적 치료로 암, 만성통증, 자가면역질환 등 난치성 질환 환자 사이에서 꽤 알려진 의사다. 머리카락, 혈액, 소변 검사를 받은 뒤 처방받은 약을 꾸준히 먹은 덕분에 증상은 거의 사라졌는데, 안정적인 면역 관리를 위해 지금도 주치의 삼아 정기적으로 그를 만난다.
A원장 진료를 받으려면 병원 예약 앱에서 치열한 '예약 전쟁'을 치러야 한다. 장기 환자로 예약이 거의 차 있어 신규 환자를 받을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칠전팔기' 도전 끝에 어렵사리 첫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으러 가던 날, 비좁은 내부 시설과 지극히 사무적인 직원들의 응대 태도에 적잖이 실망을 했다.
환자 1명당 진료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환자들이 제 예약 시간에 A원장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1시간 이상 대기가 기본이다. 그런데도 진료 예약 전쟁이 벌어지고, 너무 오래 기다린다고 항의하거나 불만을 표시하는 환자가 없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비결은 A원장의 열정과 그에 대한 신뢰였다.
그는 공부하는 의사다.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하다시피 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환자들은 자신의 진료 시간도 충분히 확보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참을 수 있다.
그는 참 친절하다. 지난 진료 이후 몸 상태는 어땠는지, 약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대소변은 잘 보는지, 특별히 통증이 있는 곳은 없는지 꼬치꼬치 묻고 기록한다.
다음 예약 때까지 먹을 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지켜야 할 생활 수칙을 알려준 뒤 하고 싶은 말은 더 없는지 또 묻고 기다려준다. 내 경우 10분 정도면 충분한데, 진료실을 나올 때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대학병원의 '5분 진료'에 길들여진 환자 입장에선 꿈도 꾸지 못할 배려다.
환자 맞춤형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절차이지만 의원 수익 측면에선 완전히 마이너스다. 환자 1인당 진료 시간이 길면 하루에 보는 환자 수는 그만큼 적어지고, 그에 비례해서 수익도 줄어든다. 그걸 알면서도 A원장은 자신의 진료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수익 창출보다는 환자를 잘 고치는 게 삶의 목표라고 했다.
새삼스레 A원장을 떠올리는 것은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는 정부 정책에 반대해 사직서를 내고 의료 현장을 떠나 있는 전공의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정부 입장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싶지는 않지만 약자 중의 약자인 환자 입장에선 의사들에게 할 말이 더 많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생명도 살릴 수 있는 전문가이기에 환자들은 의사를 존경하고 권위를 인정해준다. 검사 결과, 치료 결과가 좋다는 말 한마디에도 환자들이 의사에게 폴더 인사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하는 환자들에게 의사는 '강자'인 것이다.
전공의들이 최우선의 가치인 환자 치료를 포기하는 순간 스스로 권위와 명예를 내려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어떻게 환자들을 대하려고 이럴까, 생각할수록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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