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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모든 주부는 금융문외한이다?

입력
2024.03.13 18:00
수정
2024.03.13 18:3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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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하기 쉽지 않은 ELS 배상기준안
주부?은퇴자 일률적으로 높은 배상에
20차례 가입자도 속아 가입한 거라니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 원장이 11일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에서 홍콩 H지수 ELS 검사결과 및 분쟁조정기준 관련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

이복현 금융감독원 원장이 11일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에서 홍콩 H지수 ELS 검사결과 및 분쟁조정기준 관련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


몇 해 전 지인 A씨는 평소 거래하던 은행에서 투자상품에 가입했다. 직원이 추천한 ‘리버스인덱스펀드’였다. 주가지수가 올라가면 수익률이 높아지는 일반적 인덱스펀드와 반대로 지수가 떨어지면 수익이 나도록 설계된 상품이었다. 기대와 달리 주가는 연일 상승곡선을 그렸고,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았다. 그는 30% 남짓 원금을 까먹고 해지를 했다. 남들이 이익을 볼 때 그만큼 손실을 봤으니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컸다. 그래도 배상받은 건 한 푼도 없다.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 투자자들이 본 손실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분쟁조정기준을 내놓았다. 대체로 손실액의 20~60% 범위 내에서 배상을 받을 걸로 보인다. 예금을 하러 은행을 찾았는데 ELS 가입을 권유하고, 말귀를 알아듣기도 쉽지 않은 고령층에게 투자상품 이해를 강요했다고 한다. 숱한 펀드 불완전판매 사태를 겪고도 이 모양인 은행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잘못했으니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기준안의 기본적인 구조는 이렇다. 은행의 경우 부적절한 판매에 대한 기본배상비율이 25~50%다. ELS를 판매한 모든 은행이 상품 설명 의무를 다하지 않았거나 투자자 성향 분석을 제대로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은행별로 모든 가입자에게 많게는 50%, 적게는 25%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투자자에 따라 가감이 있다. 최대 45%포인트를 더하거나 차감한다.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100% 가까이 배상을 받을 수도 있다.

고민의 결과물이겠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납득이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가산 요인을 보자. 금융취약계층은 5%에서 최대 15%포인트까지 추가 배상이 된다. 65세 이상 고령자, 은퇴자, 그리고 주부가 그 대상이다. 요즘 그 누구보다 재테크에 열정적인 주부들이라면 발끈해야 한다. 대한민국 모든 주부를 싸잡아서 금융문외한이라니. 이런 과도한 일반화는 남성 쪽에서 보나 여성 쪽에서 보나 성차별에 가깝다. 아직 마음은 20·30대 청춘인 고령∙은퇴자들도 괘씸하게 여길 일이다. 이 기준이라면 심지어 금융회사에 다니다 엊그제 은퇴한 이들조차 금융취약계층이 된다.

차감 요인도 다르지 않다. 손실을 본 투자자 중에는 과거 ELS를 통해 여러 차례 약정수익을 거둔 이가 상당수다. 그런데 차감 대상은 과거 가입 횟수가 21차례가 넘는 이들이다. 20차례까지는 아무런 페널티가 없다. 과거 ELS 손실을 겪었어도 차감률은 15%포인트에 그친다. 정말 10여 차례 ELS 투자를 했고 손실 경험도 있는 투자자까지 배상을 해주는 게 정상인가. 심지어 금융회사 현 임직원조차도 10%포인트 깎는 게 전부다. 차감을 해도 일부는 배상받을 것이다.

상품 간 형평성도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금융당국이 나서서 은행들에 기준을 들이밀며 배상을 강제한 건 ELS를 비롯해 파생결합펀드(DLF), 라임펀드 등 투자자들이 다수인 상품들이다. A씨처럼 은행 직원 권유로 가입자가 그리 많지 않은 투자상품에 가입했다 손실을 본 이들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같은 기준이라면 다만 얼마라도 배상을 받겠지만, 이들이 금융사에서 배상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다수가 울어야만 배상을 해준다.

억울한 투자자 구제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숱한 무임승차자를 만드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심각한 시장 왜곡이다. 당국이 제 할 일(감독)은 소홀히 하고, 사후적인 개입만 하니 생기는 일이다.


이영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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