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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일보 탐사대, 경주 앞바다 문무왕릉 확인

입력
2024.03.11 04:30
수정
2024.03.13 18:02
25면

편집자주

매일매일, 시시각각 한국일보 플랫폼은 경쟁매체 보다 빠르고 깊은 뉴스와 정보를 생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54년 창간 이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거나 국민적 감동을 이끌어낸 수많은 특종이 발굴됐다. 지난 70년 다수의 특종과 사건 중 파장이 컸던 내용들을 연도별로 안배해 ‘70대 특종’을 골라내 뉴스 이용자들에게 소개한다.

한국일보 탐사대의 수중릉 확인 사실을 보도한 1967년 5월 16일자 기사.

한국일보 탐사대의 수중릉 확인 사실을 보도한 1967년 5월 16일자 기사.

삼국사기 다수의 곳에 신라 문무왕(626~681)의 죽음과 관련, 흥미로운 내용이 확인된다.

‘문무왕이 승하하자 시호를 문무라 하고 유언에 따라 신하들이 동해 어귀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그 능은 감은사 동쪽 바다에 있다(삼국사기ㆍ왕력)…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 뼈를 장사 지낸 곳이 대왕암이고, 절은 감은사이며, 훗날 문무왕이 용으로 화한 모습을 바라본 곳에 이견대가 있다.'

선조들이 기록한 역사는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세월 속에서 전설로 마모된다. 역사 속에 실재한 사실인데도 ‘팩트’ 확인이 이뤄지지 않으면 소문 속에 살이 붙어가면서 실제와는 멀어진다. 하물며 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중릉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한국일보가 직접 나서기 전까지는 설화와 역사적 사실의 중간에 머물고 있었다.

1967년 5월 16일자 '경북 월성군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은 문무대왕릉'이라는 제목의 특종 기사가 한국일보에 실렸다. 문무왕릉의 존재를 확인, 세상에 처음 알린 쾌거였다. 당시 한국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다년간에 걸쳐 진행 중이던 '신라 학술 조사사업'의 성과였다.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는 문무대왕이 수장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을 뿐 정확한 위치와 구조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까지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일보가 주도하고 국내 최고 전문가들이 나선 조사단은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둘레 200m 정도의 바위섬, 대왕암에 대한 실측 조사를 벌였다.

섬 가운데서 매장 당시 쓰인 것으로 보인 거북모양의 돌 등을 발견하는 한편, 수로를 내기 위해 인위적 공사를 벌인 흔적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대왕암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릉임을 공식 확인했다. 다만 비파괴검사 등 첨단 탐사기술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탐사봉만으로 구조를 추정하는 바람에 일부 발표에 오류가 있었음이 나중에 확인됐다. 예컨대 수중릉 안 거북바위 밑에 빈 공간이 존재하며 그곳에 부장품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지만, 2000년 이뤄진 지하투과 전자탐사에서는 단단한 암반이 확인됐다.

학계에서는 문무왕릉 탐사보다는 한국일보 주도로 이뤄진 일련의 신라 유적 탐사에 주목하고 있다. 1964년부터 다섯 명산(신라 오악)에 대한 학술조사에 나서 태백산 자락에서 반가사유석불(半跏思惟石佛)을 발견하는 등 국보급을 포함, 147점의 귀중한 문화재 발굴이 한국일보의 공헌이라는 것이다.

한국일보 70년·70대 특종 (연도순)

3 도굴범에 의한 경주 석가탑 훼손(1966)
4 한국일보 탐사대, 경주 앞바다 문무왕릉 확인(1967)
5 설악산 ‘죽음의 계곡’ 산악등반대 조난사고 (1969)
6 정인숙 여인 피살사건(사진·1970)
7 대한항공 ‘포커 F-27’ 쌍발 여객기 납북 시도사건(1971)

※연재 일정상 70개 특종 가운데 50개를 선별 게재하기 때문에, 일부(예: <3>도굴범에 의한 경주 석가탑 훼손ㆍ1966) 특종은 소개되지 않습니다. 독자님들의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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