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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 고봉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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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립다. 온돌방 이불 속에 묻어 둔 뚜껑 덮인 사발에 담긴 따뜻한 밥이.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 어머니들은 밥에 아랫목을 내주고 대문 밖에서 가족을 기다렸다. 어머니의 고봉밥이 떠올라 눈물 글썽이는 이도 있겠다. 고봉밥은 곧 어머니의 사랑이니까. 큰 밥그릇에 밥을 가득 퍼 담고, 그것도 성에 안 차 수북하게 쌓은 게 고봉밥이다. 온 가족이 둥근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시절, 우리는 식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삶을 배웠다. 깔깔깔 웃으며 맛있게 먹은 건 그저 밥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힘이었다.
한국인에게 밥은 특별하다. “밥 한 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 “밥이 보약” 등의 속담처럼 밥은 우리 몸을 살리는 귀한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밥을 하늘이라고 예찬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밥이 하늘입니다.(하략)”
먹을거리가 풍족한 지금도 밥은 귀하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니까. 소중한 만큼 밥을 표현하는 우리말도 풍부하다. 오래전 임금은 수라를 젓쉈다. 웃어른은 진지를 잡수고(드시고, 자시고), 우리는 밥을 먹는다. 잡수다보다 더 높은 표현이 ‘젓수다’다. 아기는 맘마를 먹고, 아르바이트에 치인 젊은이들은 끼니를 때운다. 귀신도 제삿날 메를 먹고, 초상난 집에선 저승사자한테 사잣밥을 대접한다.
밥은 먹는 장소도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먹는 곳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예전에 옥에 갇힌 죄수에게 벽 구멍으로 몰래 들여보내던 밥은 구메밥이다. 구메는 구멍의 옛말로, 감옥살이한다는 말을 “구메밥 먹다”로 달리 표현하기도 했다.
농사철 논에 모를 옮겨 심거나 잡초를 뽑을 때 논둑에서 먹는 건 기승밥이다. 대학 시절 농촌활동 가서 먹었던 기승밥은 지금껏 내 인생 최고의 맛으로 남아 있다. 선후배, 동기들과 논둑에 앉아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고 고추장에 비벼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먹었다. 모내기하다 들판에서 먹는 못밥은 막걸리를 곁들이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
눈물에 버무려진 대궁밥도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어른들은 배가 덜 차도 밥을 남겼다. 흰쌀밥에 반찬 국물이라도 묻을까 조심조심 먹었다. 남긴 음식을 기다리는 아랫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남이 먹다 남긴 밥은 대궁 혹은 대궁밥이다.
쌀쌀한 봄날 입맛을 잃었다면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했던 이와 함께 드시라.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면 어떠랴. 마음 통하는 이와 먹는 따뜻한 한 끼는 정이고 믿음이고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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