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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과 이강인, 두 가치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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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선공후사를 떠들어도, 오늘날 그 정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는 축구 국가대표인 듯하다. 잘나가면 국민적 관심을 한 몸에 받아 광고 수익 등의 실리를 챙길 수도 있겠지만, 똥볼 한 번에도 전 국민의 지탄을 받아야 한다. 국뽕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자리다. 소집 기간 일당과 승리 수당 등을 조금 받긴 하지만 높은 몸값의 소속팀 연봉에 비길 바가 아니며 부상 리스크도 크다. 병역 면제 메리트가 없다면 해외 일류 리그에서 뛰는 선수에겐 국가대표는 빛 좋은 개살구거나 독이 든 사과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개인의 영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뛴다’는 것을 순수한 명예와 의무로 여기는 기풍이 남아 있어 고마웠다. 한국 사회 각 부문에서 공적 마인드와 공공성이 급속히 퇴조하는 것을 감안하면 축구 국가대표는 선공후사의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르겠다. 그 표상이 손흥민 선수다. 소속팀의 빡빡한 경기 일정에도 늘 국대 경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 것이 영광”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우리는 잃어버린 무엇을 느낀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같은 가치들 말이다. 그가 국민에게 사랑받는 것은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라는 타이틀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양규 장군, 영화 ‘서울의 봄’의 이태신 장군 등 ‘참군인’에 대한 열풍이 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손흥민이 그런 자세를 가지게 된 것은 국가대표 선배들의 처절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8년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에 5대 0 참패를 당했던 대표팀은 다음 벨기에전에선 그야말로 ‘핏빛 투혼’을 펼쳤다. 유럽 축구 강국과의 실력차가 엄연했지만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선수들은 피가 철철 흐르는 부상에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헤딩을 했고 몸을 던져 슈팅을 막았다. 손흥민은 그런 역사를 보며 성장한 선수이며 어쩌면 그런 세대의 마지막 캡틴일지 모르겠다.
2001년생인 차세대 에이스 이강인 선수가 축구를 배울 때는 이미 우리는 월드컵 4강을 경험한 나라였다.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1승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실감하기 어려운 세대다. 소속팀 경기에서 인정받고 주전 경쟁에서 앞서가는 게 그에겐 더 절실할 터다. 국대 경기 전날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손흥민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동년배 절친으로 알려진 일본의 구보 다케후사는 이번 아시안컵을 앞두고 “리그 중에 아시안컵이 열리는 게 아쉽다”며 “내게 돈을 주는 팀은 레알 소시에다드다”고 말해 국대 경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최강의 전력으로 평가받던 일본은 우리보다 더 일찍 짐을 쌌다. 이강인 역시 국대 경기에 대한 인식이 구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성싶다.
뒤늦게 알려진 한국 국가대표팀의 신구 에이스 충돌은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감독의 리더십 부재나 축구협회의 무능 등은 늘 되풀이되는 문제이지만, 이번 사태는 세대 간의 가치관 충돌이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과제를 던지는 것 같다. 이강인 설영우 정우영 선수가 아시안컵 준결승 당일 경기장에서 물병 세우기 놀이를 한 것을 두고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젊은 선수들은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정당한 보수가 나오지 않는 일에 왜 몸을 던져야 하죠? 이런 게 ‘열정 페이’ 아닌가요? 탁구나 놀이를 즐기면서 축구를 하면 안 되나요?” 이미 병역 면제를 받은 선수들이 계속 국대 경기에 열정을 쏟게 만들 동력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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