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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검은 XX" 40년 돌봐준 양아버지 살해하게 된 한 마디

입력
2024.02.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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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손 위해 입양돼 사실상 '머슴 살이'
사고로 오른팔 잃고 터져 나온 원망
"계획 살인" 1·2심 재판부 징역 18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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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 오후 7시 12분. 전남 여수시 한 주택가 앞에서 10여분 째 서성이던 50대 남성 A씨가 결심을 한 듯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남성은 술에 잔뜩 취해있었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마스크를 썼다. 남성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에선 여러 차례 고성이 오갔다. "머리 검은 짐승"이란 말이 나오자, 말다툼은 극에 달했다.

30여분 뒤, 흉기에 찔린 B(79)씨와 손에 피를 묻힌 A(58)씨가 잇따라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B씨는 병원 치료를 받다 다음날 숨졌고, 범행 후 집에서 기다리던 A씨는 체포됐다. A씨가 이날 살해한 B씨는 그의 양아버지였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40여 년을 한 가족으로 살아왔던 이들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학교 대신 소 키우고 밭 매고

비극의 시작은 두 부자가 처음 만난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중반 고아원을 전전하던 A씨는 11세 때 B씨에게 입양됐다.

B씨의 입양은 가족을 만들기 위해 자녀를 찾는 일반적인 입양이 아니었다. 섬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B씨가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씨를 비롯한 몇몇 고아들을 입양한 것이다. 이 때문에 A씨는 B씨의 친자식들과 달리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대신 소를 키우거나 밭을 매는 일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주민등록 신고도 하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섬마을 주민들 역시 A씨를 B씨의 자녀가 아닌 '머슴'이라 불렀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A씨와 B씨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다. A씨는 17세가 되던 무렵 B씨가 선장으로 있는 선박의 선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6세 무렵엔 결혼해 독립한 뒤 인천과 목포 등지에서 뱃일을 하다 선장까지 하게 됐다. 7억 원 상당의 선박도 보유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성장했다. A씨는 독립한 뒤에도 B씨를 도와 일을 했고, B씨를 아버지라 부르며 가족처럼 지냈다. A씨는 학교도 보내주지 않는 양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으로 인정받고 싶은 모순된 감정을 가진 채 자랐다.

"배와 집 땅 왜 안 주세요?"

평화로운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A씨가 2021년 11월 24일 자신이 선장으로 있던 선박에서 뱃일을 하던 중 어망에 팔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한 게 계기가 됐다. 결국 오른팔을 절단해야 했고,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겪으면서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됐다.

이 사고는 수십 년 간 가슴 속에 묻어둔 세상과 양아버지에 대한 원망에 방아쇠를 당겼다. 특히 A씨는 양아버지가 20여년 전 배와 집,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여태껏 지키지 않아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덩이를 굴리듯 불만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사건 당일. 자신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B씨는 A씨 집을 찾아갔다. 이들은 서로 거실에 마주 앉은 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말다툼을 벌였다. 오후 7시 30분쯤 A씨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약속한 일을 알고 있지 않느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 분노가 폭발한 계기는 양아버지의 한 마디였다. B씨가 A씨에게 "머리 검은 짐승은 이랑께(이러닌까) 안 기른갑다(기르나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A씨는 이성을 잃었다. 부엌으로 가 양어머니가 건네준 물을 받아 마신 뒤 싱크대에 놓아둔 흉기로 양아버지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도 "평소 '고아'라는 말을 들으면 정말 화가 많이 났다"며 "아버지도 이런 말을 하지 않는데, 당시엔 이보다 심한 '짐승'이라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흉기 주인은?

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 재판에서 쟁점이 된 건 계획 살인 여부였다. A씨는 "흉기가 원래 B씨 집에 있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어머니가 평소 집에서 해당 흉기를 본 적 없다고 진술한 데다, A씨 아내 역시 최초 진술에서 "그 흉기는 남편이 평소 자주 사용하던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A씨가 고민도 없이 비교적 짧은 시간에 흉기를 찾은 점에 대해서도 "사전에 흉기를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봤다. A씨는 팔 절단 이후 정신과 약물 치료 중이었다며 심신 미약을 주장했지만, 1·2심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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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재판부는 징역 18년을 선고하며 "살인은 인간의 생명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귀한 가치를 침해하는 것으로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 피해를 회복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라며 "피해자는 수십 년간 가족으로 여겼던 피고인으로부터 불시에 공격을 당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피해자의 유족들 역시 엄벌을 탄원하고 있다"고 판시했다.

2심 재판부도 원심 판단을 유지하며 A씨 항소를 기각했다. 2심 재판부는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에 대한 계획적 살인의 양형 권고기준은 징역 15~30년으로 피고인의 형량은 하단에 가깝다"며 "피고인의 나이, 성행, 가족관계, 범행 동기, 수단 및 결과, 범행 후 정황 등 모든 양형 사정을 종합해 보면, 피고인에 대한 원심의 형이 재량의 합리적인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무거워서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여수=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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