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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자 해고 근거 조항, 이참에 폐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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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짐짓 거룩하고 위엄 있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을 옹호하다가, 뒤돌아 어떤 약자에게 속삭인다. “아니, 당신은 빼고. 당신한텐 적용 안 돼.” 어느 위선적인 정치인뿐 아니라, 제도와 법률도 그런 경우가 상당하다.
많은 장애인에겐 이동권이 없고,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혼할 권리가 없으며, 근로기준법상의 중간착취(중간업자의 임금 떼기)를 당하지 않을 권리는 용역·파견 노동자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육아휴직의 권리조차 그렇다는 것을 이번에 새로 알게 됐다.
지난 4일 국민은행 콜센터 용역업체가 육아휴직자와 육아기 단축 근로자를 해고(고용승계 거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선 의아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엄연히 육아휴직이나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사업주는 처벌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관련 법령을 찾아봤더니, 제도는 교묘하게 차별을 합법화하고 있었다. 남녀고용평등법(19조, 제19조의2)을 보면 사업주는 8세 이하 자녀를 둔 근로자의 육아휴직 신청이나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허용해야 하는데, 관련 시행령(10조, 15조의2)을 통해 근로자의 근속기간이 6개월 미만이면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초저출생 사회에서 6개월이 안 된 새내기 직장인이라고 해도 육아휴직을 못 쓰게 하는 건 합당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정도는 사업주에게 권한으로 줘야 한다는 입장도 납득 못할 바는 아니니 이 논쟁은 별론으로 하자.
문제는 용역 노동자와 같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10년간 같은 콜센터에서 일해도 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서류상 입사를 다시 해야 하는 이들은, 새 업체가 선의로 허가해주지 않으면 매번 6개월간은 육아휴직이나 단축근로를 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은행 콜센터의 새로운 용역업체 고려휴먼스가 육아휴직 중이거나 육아기 단축근로 중인 직원 8명에게 “당장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고용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공지한 것은 법조문만 보면 ‘합법’이 된다.
이 사안이 언론에 보도된 뒤 업체가 입장을 바꿔 모두 고용승계하기로 했는데, 이는 법의 압박이 아니라 여론의 압박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론을 압박할 수 있었던 건 이들에게 노조가 있어서 공론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정규직 노조조직률이 2.8%(2023년 8월 기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자료)에 불과해, 이런 일을 당해도 대부분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합계출산율 0.78명의 국가인데도, 육아휴직조차 비정규직 차별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현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이쯤 되면 ‘차별’에 진심인 사회 아닌가. 성차별이나 비정규직 차별은 남성과 정규직이라는 유구한 기득권 수혜자가 있기 때문에 기나긴 세월 거의 시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초저출생이다. 정부가 저출생 문제 해결에 사활을 걸면서, 비정규직이 육아휴직을 쓰면 사실상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그대로 두는 건 말이 안 된다. 용역·파견 노동자 규모는 수백만 명에 이른다.
사실 전 지구적인 인구 폭발에 따른 기후위기나 과도한 경쟁사회의 스트레스를 감안할 때, 저출생과 인구축소에 긍정적인 면도 크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저출생 위기감이 여러 불평등에 대한 감각을 깨우고 시정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좋은 수단이 되고 있음에 한편 감사하다. 고용노동부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육아휴직과 단축근로 권리를 박탈하는 ‘근속 6개월 규정’은 하루빨리 폐지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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