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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로 줄어든 대양 연결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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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파나마운하관리청이 하루 운하 통행량을 올 2월까지 절반가량 줄이겠다고 밝혔다. 세계 물동량의 약 3%, 동아시아와 미국 동부 해상 물류 최대 25%가 이동해온 대서양-태평양 연결 수로가 좁아진 거였다. 파나마 정부가 운하 통행료로 버는 돈은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약 6%(2021년 기준 40억 달러). 무역 거점이라는 전략적 지위에 따른 금융 물류 등 서비스 산업(GDP의 약 82%)도 위축될 수 있는 결정이었다. 국가 경제에도 치명적인 저 결정의 배경은 기록적인 가뭄, 즉 기후 위기였다.
파나마운하는 수위가 서로 다른 8개 구간의 거대한 물길이 9개 갑문으로 나뉘어 대륙을 관통하는 구조다. 구간별로 물을 채우고 빼면서 선박을 띄우거나 앉혀 다음 구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종의 해상 수평 엘리베이터. 그 운하에 물을 공급하는 두 개의 거대한 호수(알라후엘라호, 가툰호) 수위가 140년 기상 관측 이래 지난해 최저 수위를 기록했다. 두 호수는 파나마 인구 절반의 식수원이기도 하다.
파나마운하는 19세기 프랑스가 착공했다가 좌절한 뒤 20세기 초 미국이 건설했다. 1914년 완공되기까지 2만7,500여 명의 노동자가 말라리아 등 전염병과 사고로 숨졌다. 운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은 콜롬비아령 파나마의 독립(1903)을 도왔고, 운하 건설 후 운영권을 무기한 보장받는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는 운하 양쪽 각 8㎞ 구간의 이른바 ‘운하 지대’를 미국 정부가 파견한 총독이 통치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운하 종사자 가족 등 미국인 4만5,000명이 그곳에 거주했고 독자적인 행정조직뿐 아니라 여단 규모의 미군까지 주둔했다.
운하 통제권-주권을 되찾기 위한 파나마인들의 저항은 20세기 내내 이어졌다. 그 분수령인 운하지대 미국인 학교 파나마 국기 게양 사건과 3일간의 유혈 반미 시위가 1964년 1월 9일 시작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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