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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달라도, 공휴일 아니어도… '크리스마스에 진심' 동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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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에도 크리스마스 열풍이 불고 있다. 주요 호텔과 음식점은 이미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저녁 예약이 마감됐다고 밝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없었던 기이한 현상이다. (중략) 베트남 정부도 수도 하노이 성요셉성당에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을 허용하고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2001년 12월 국내 한 통신사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베트남 현지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같은 해 미국과의 양자무역협정(BTA) 체결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준비, 개혁개방 움직임을 성탄 분위기 확산 이유로 꼽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에선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행위가 ‘기삿거리’가 될 만큼, 이례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22년이 흐른 지금, 성탄절은 더 이상 서양에서 온 낯선 문화가 아니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18일 저녁, 베트남 하노이의 대표 관광지 성요셉성당 앞은 들뜬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친구, 연인, 가족들은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건물과 조형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반짝이는 장식으로 가득 채워진 하노이 중심가 항마거리는 산타 인형과 트리, 조명을 구매하려는 베트남인과 해외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1980년대 영국 팝 듀오 ‘왬(Wham!)’의 히트곡 ‘라스트 크리스마스’ 등 유명 캐럴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은 종교 색채가 강한 크리스마스를 법정 휴일로 인정하지 않는다. 천주교·개신교 신자 비율이 10% 미만이라 큰 영향력을 미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성탄절 도심 풍경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날 만난 20대 응우옌투이티엔은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말 분위기를 느끼려 매년 성당을 방문하고 있다”며 “지난해 12월 24일 이곳을 방문했다가 인파에 휩쓸려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올해는 조금 일찍 찾았다”고 말했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 희고 풍성한 수염을 지닌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와 눈썰매를 끄는 순록. ‘크리스마스’ 하면 통상 떠오르는 이미지다. 눈은커녕 12월에도 반소매를 입어야 하는 동남아시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각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성탄절을 기념하고 있다.
주요 도시 곳곳에선 호화롭게 꾸며진 트리가 오가는 시민들 발길을 붙잡는다. 아이들은 애타게 선물을 기다린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중 가톨릭 국가는 필리핀뿐이고, 12월 25일을 공휴일로 정한 나라도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3개국에 그치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의외다. 동남아에서도 크리스마스가 종교적 의미를 떠나, 하나의 ‘즐길 거리’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베트남에서 크리스마스는 젊은이들의 축제다. 성탄 전야에는 사람들이 대거 길거리로 몰려나오는 탓에 교통 정체가 연중 최고 수준에 달한다. 오토바이가 도로는 물론, 인도까지 꽉 들어차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장면도 연례행사처럼 해외 토픽으로 보도된다.
성탄절은 법정 휴일이 아닌데도 전날 밤늦게까지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려는 시민들의 모습에 외국인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인류학자 라일런 히긴스 캐나다 세인트메리대 교수는 미국의소리(VOA)에 “베트남의 크리스마스는 보통 가족과 함께 보내는 북미의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베트남 경제가 급성장하고 국민 소득도 증가하면서 크리스마스 풍경도 더욱 화려해졌다. 유통업계는 각종 할인을 앞세워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가 지난달 베트남인 3,8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 81%(복수 응답 허용)가 ‘연말 세일 때문에 쇼핑에 나선다’고 답했다.
크리스마스 장식(26%)이나 다른 사람을 위한 선물(24%) 등 구매를 위해 지갑을 연다는 답변도 뒤를 이었다. 지방정부 공무원 뚜옌(36)은 “대학을 다니던 15년 전만 해도 크리스마스는 여유 있는 사람들만 즐기는 행사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친구, 동료와 카드나 선물을 주고받는 게 흔한 일이 됐다”고 말했다.
아이들 역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다. 연말이 되면 ‘선물 증정’을 위해 산타 복장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게 쉽지 않을 정도다. 아이 한 명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함께 사진 찍는 데 드는 비용은 최소 6만 동(약 3,200원). 노래를 같이 부르는 등의 서비스가 추가되거나, 예약 시간이 크리스마스 ‘피크타임’에 가까울수록 가격대는 점점 높아진다.
유치원 교사 까오티민은 “지난해 원아들이 산타를 만난 뒤 매우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어 올해도 12월이 되자마자 바로 서비스를 예약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아이들 대부분은 선물이 사실 엄마아빠가 준 것이란 사실을 안다. 학부모들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산타는 그저 대신 전달해 주는 일종의 ‘재미있는 캐릭터’로 생각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1년 내내 영상권 기온이 이어지니 눈을 볼 일이 거의 없는 만큼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눈 위를 달려와 선물 주는 산타’도 동화 속 얘기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크리스마스는 모두가 즐기는 축제다.
종교가 다른 국가라고 크리스마스를 배척하는 건 아니다. 국민 10명 중 9명 이상이 불교 신자인 태국, 다민족 국가지만 전체 종교 중 불교 비율이 31%로 가장 높은 싱가포르의 성탄절 열기도 베트남 못지않다.
싱가포르에서는 연말이 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등 축제 ‘열대의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린다. 1984년 첫 개최 이후 올해로 39년째다. 태국은 기독교 신자가 전 국민의 1%도 안 되지만, 연말엔 수도 방콕과 제2 도시 치앙마이, 휴양 도시 파타야·푸껫 등에서 캐럴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크리스마스를 종교적 행사가 아닌,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이벤트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방콕 근교 유명 관광지 아유타야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 옷을 입은 코끼리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는 행사가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19년간 이어졌다. 올해도 이변이 없는 한 개최될 전망이다. 현지 매체 타이거는 “태국에선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니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많거나 외국계인 회사에선 자체 휴무일로 지정한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슬람권 국가도 예외는 아니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말레이시아, 전체 인구의 85%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 인도네시아 역시 12월 이전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한국의 한 대기업 인도네시아 주재원은 “수도 자카르타 대형 쇼핑몰에 거대한 트리가 설치됐고, 이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면 입점 상점이 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며 “히잡을 두른 무슬림 여성이 크리스마스 장식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고, 기독교인 이웃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일부 이슬람 지도자가 신자들에게 “기독교 명절 축하는 샤리아(이슬람 관습법)에 어긋난다. 메리 크리스마스란 인사도 하지 말라”고 설교하지만, 성탄 분위기를 꺾지는 못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내년부터 성금요일, 부활절, 성탄절 등 기독교 기념일 이름을 기존의 아랍어에서 인도네시아어로 바꾸기로 했다. 예컨대 그간 크리스마스는 ‘이사 알 마시(Isa Al-Masih·메시아 예수)’라는 이슬람식 표현으로 불렸는데, 앞으로는 ‘예수 크리스투스(Yesus Kristus)’로 바뀐다. “종교 다원주의 보호를 위한 조치”라는 게 정부 설명이지만, 정치권에서는 내년 2월 대선을 앞두고 2,900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을 포섭하려는 인기영합주의 꼼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반면 ‘크리스마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국가도 있다. 보르네오섬 북부에 위치한 이슬람 산유국 브루나이는 2015년 무슬림의 크리스마스 참여를 법으로 금지했다. 신앙에 반한다는 이유였다. 트리를 설치하거나 캐럴을 부르고, 산타 모자를 착용하는 등 크리스마스 축하 행위를 하면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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