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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이 미래" 사활 건 동남아… 올해 투자는 '혹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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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구팀은 빛을 투과하는 특수 친환경 콘크리트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값비싼 광섬유가 아닌, 화력발전소와 소각장에서 나오는 비산재, 슬러지(침전물), 폐유리를 활용해 기존보다 강도가 높고 수명이 길지만 가격은 저렴한 게 특징입니다.”
지난 9월 24일 베트남 하노이 기획투자부 산하 국가혁신센터(NIC). 탕반람(41) 광업·지질대 박사가 얇은 판 형태의 콘크리트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는 “2021년부터 연구가 진행 중인데, (상용화되면) 산업 폐기물 처리 압력과 비용을 줄여 건설 기술 분야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 자리는 베트남 신생 벤처기업 산실인 국가혁신센터의 창립 5주년 행사(지난달 1일)를 일주일 앞두고 센터 소속 주요 스타트업(신생기술기업)을 수십 명의 내·외신 기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마련됐다.
뒤이어 가상현실(VR) 연구·개발과 장비 운용·대여 스타트업 '어니언'의 응오푸엉즈이 대표가 자동차 레이스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고 포뮬러1(F1) 선수처럼 시범 운행을 하며 말했다. “우리는 자동차·비행기 운전 시뮬레이션 체험을 연구하고 고객들이 실제 경험할 수 있게 (장비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이륙, 착륙, 비상 상황 처리 등 모든 절차를 배울 수 있어요.”
이날 3D 프린팅 관련 기업과 의료, 사이버 분야 스타트업들도 앞다퉈 진행 중인 개발 상황을 소개했다.
일주일 뒤인 지난달 1일 열린 창립 5주년 기념식에는 팜민찐 베트남 총리를 비롯한 정부 인사가 대거 출동해 스타트업 발전 지원을 약속했다. 응우옌치중 기획투자부 장관은 “(베트남 스타트업들이) 강력한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국제 무대에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모기업 메타, 미국 반도체 회사 퀄컴, 인텔 등 글로벌 기술 대기업도 행사장 한쪽에 부스를 마련하고 베트남 기술 생태계와의 협력 의사를 내비쳤다. 이날 행사에는 2만 명이 참석했다.
베트남 혁신센터에서 진행된 일련의 행사는 현지 정부가 얼마나 스타트업 육성과 지원,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동남아시아가 혁신 생태계 구축에 나선 것은 약 15년 전부터다. 한국이 30년 넘는 스타트업 육성 역사를 지닌 것과 달리, 동남아 국가 대부분은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들어서야 변화 물결에 동참했다.
시작은 늦었지만 성장세는 가팔랐다. 초기 해외 유학파를 중심으로 닻을 올린 동남아 스타트업 창업 붐은 이제 젊은 세대 전반에서 일상이 됐다. 글로벌 벤처캐피털 정보 플랫폼 트랙슨은 지난달 말 기준 동남아에 본사 또는 최소 1개의 사무실을 둔 스타트업이 약 10만3,000개라고 분석했다.
동남아 최대 승차 공유 플랫폼 그랩(싱가포르)과 고젝(인도네시아), 전자상거래 업체 쇼피(싱가포르), 전자지갑 모모(베트남), 여행플랫폼 트래블로카(인도네시아) 등 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의 유니콘 기업도 52개에 달한다.
이들은 투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2022년 동남아 신규 벤처 투자 규모는 약 13조1,000억 원으로, 같은 기간 한국 투자액의 2배에 달했다. 금액의 절반 이상은 초기 기업으로 향했다. ‘대박’을 좇는 다국적 벤처캐피털(VC) 업체들도 이 지역 스타트업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 셈이다.
이는 ①동남아 소득 수준이 고성장으로 빠르게 상승하고 ②인구가 6억8,000만 명에 달하는 거대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고 ③인구 절반이 30대 이하인 전 세계에서 가장 ‘젊은 지역’이라는 점이 맞물린 결과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정보기술(IT)기반 서비스가 빠르게 자리 잡은 데다 합리적 인건비와 저렴한 임대료까지, 스타트업 성장에 최적의 조건이 갖춰지면서 과거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스타트업과 글로벌 큰손들도 동남아로 눈을 돌렸다.
동남아 스타트업 선두주자는 싱가포르다. 벤처 업계에서는 ‘동남아에서 스타트업으로 성공하길 원한다면 싱가포르로 향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글로벌 스타트업 분석 기관 ‘스타트업게놈’이 자금 유치, 인재, 기업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발표한 2024년 스타트업 생태계 순위(도시 기준) 상위 20위에 이름을 올린 동남아 도시는 싱가포르(7위)가 유일하다. 그 뒤를 중국 베이징(8위), 한국 서울(9위), 일본 도쿄(10위)가 이었다.
싱가포르는 지난해 동남아 전체 벤처캐피탈 펀드 신규 투자금의 80%를 유치하기도 했다. 정부가 기업 친화적 환경을 만든 게 주효했다는 평가다. 예컨대 2016년 싱가포르 통화청(MAS)이 금융 분야에서 최초로 규제 샌드박스를 시작한 이후 교통, 에너지, 의료, 환경, 기술 분야에서도 규제 문턱이 낮아졌다.
베트남은 싱가포르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정부가 2016년 ‘창업 국가의 해’를 선포한 뒤 경제 관련 대부분의 분야에서 스타트업 열풍이 불고 있다. 베트남은 정부 주도하에 연 8만 명의 기술 인력이 배출돼 기술 생태계가 풍부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정부 독려 속에 대기업도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 힘을 보탠다. 베트남 최대 기업 빈그룹은 지난달 29일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 원) 규모의 벤처 자회사 ‘빈 벤처스’를 설립하고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칩, 클라우딩 분야 스타트업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인구 약 2억7,000만 명으로 방대한 소비 시장을 지닌 인도네시아는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 인센티브 △디지털 인재 장학금 지급 △규제 완화 등 다양한 당근책을 주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태국도 ‘중소득 국가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타트업 생태계 구축에 부심하고 있다.
다만 올해 투자 분위기는 다소 냉랭하다. 3분기(7~9월) 동남아 스타트업이 조달한 자금은 총 9억7,900만 달러(약 1조3,500억 원)로 나타났다. 2019년 이후 분기별 펀딩액이 10억 달러 밑으로 내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들어 9월까지 총 펀딩액(32억6,000만 달러)도 2020년 동기 대비 절반 아래로 고꾸라졌다. 글로벌 경기 침체 장기화로 투자 심리 전반이 위축되면서 스타트업 시장에도 찬바람이 불었다는 평가다.
싱가포르 경제 매체 딜스트리트아시아는 “그나마 초기 단계 투자는 선방했지만, 후기 단계 투자는 73.6% 감소했다”며 “자금 사정이 줄어든 벤처캐피털 등 투자자들이 ‘스타트업 옥석 가리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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