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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가 극복하지 못한 무지의 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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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작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가 1960년 7월 출간되면서 미국 사회는 격랑에 휩싸였다. 1930년대 미국 앨라배마주 작은 마을 먼로빌(Monroeville).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위기에 몰린 흑인 남성을 백인 주민 대다수의 위협 속에서 백인 변호사가 변호하는 과정에 대해 변호사의 10대 딸이 분노와 연민, 풍자로 고발하는 내용. 브라운대 교육위 판결(54년)과 로자 파크스 사건(55년), 흑인 여학생의 앨라배마대 입학에 반발한 백인들이 벌인 터스컬루사 폭동(56년) 등 인종 차별-갈등이 격화하던 무렵이었다.
남부 상당수 주들은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뉴욕 등 대도시 자유주의자들은 열광했다. 하퍼 리는 1962년 퓰리처(소설부문)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크리스마스(12월 25일)에 맞춰 개봉된 동명의 영화는 아카데미 각색상과 남우주연상(그레고리 펙)을 비롯, 골든글로브와 칸영화제 등에서 다수의 상을 휩쓸었다. 미국 인종 정의에 관한 한 ‘앵무새 죽이기’만큼 강렬한 영향을 미친 작품은 드물다. 1988년 전미영어교사협의회에 따르면 중등학교 약 74%가 정식 교과과정에 그 작품을 채택했다.
작품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의 근년 평가는 좀 다르다. 한마디로 명백한 불의에 대한 ‘백인 구원자(white saviour)’ 서사일 뿐이라는 비판이다. 구원자인 변호사 핀치 역시 법적 정의를 추구하기는 하지만 당시 남부 백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차별주의자라는 사실, 스스로도 ‘니그로’라는 멸칭을 빈번하게 사용한다는 사실 등도 오늘날 청소년 권장도서로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이어져왔다. 하퍼 리가 1957년 탈고한 ‘앵무새’의 프리퀄(prequel)로 2015년 출간된 ‘파수꾼 세우기(Go Set a Watchman)’에는 핀치의 인종주의적 성향이 더 선명히 묘사돼 있다. 그건 시대-문화적 한계, 즉 하퍼 리도 극복하지 못한 ‘무지의 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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