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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농사짓기, 붓으로 농사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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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채팽윤은 다산 정약용이 인정한 남인 문단의 대표 시인이다. 글자를 모르는 시절부터 책 읽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졸라 형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고, 여섯 살이 되자 능숙히 시를 지었다. 신동이란 명성이 자자했다. 채팽윤은 스물한 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곧바로 독서당에 선발되었다. 젊고 재능 있는 문인을 양성하는 엘리트 코스였다.
"평소 임금님 얼굴을 몰라 꿈에서 항상 대궐을 맴돌았네(平生不識君王面, 一夢尋常繞玉墀)." 채팽윤이 독서당에서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숙종이 전해 듣고 채팽윤을 불렀다. "내 얼굴을 모른다고? 머리를 들어 나를 보거라." 임금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 수 없던 시절,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채팽윤의 열성 팬이 된 숙종은 하인을 시켜 그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시를 지으면 곧장 베껴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이런 이야기는 으레 후대의 각색이지만, 숙종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니 믿을 만하다.
채팽윤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이처럼 뛰어난 실력을 쌓았을까. 집에서 배웠다고 하자니 아버지 채시상은 과거 급제 근처도 못 가본 사람이었다. 큰할아버지 채유후가 나름 시인으로 유명했지만, 채팽윤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작고한 뒤였다. 채팽윤을 가르친 사람은 열일곱 살 많은 맏형 채명윤이었다. 채명윤은 마흔 가까운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장수생이다. 오랜 경험으로 공부에 숙달된 그는 아버지 대신 세 아우를 가르쳤다.
채명윤의 교육법은 혹독했다. 새벽부터 아우들을 깨워 글을 외우게 했다. 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았다. 저녁에는 글짓기를 시켰다. 역시 다 짓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았다. 하루 두 끼 먹던 시절이다. 공부를 소홀히 했다간 꼼짝없이 굶는다. 이렇게 십 년이 흘렀다. 그 결과, 첫째 동생 채성윤은 26세로 문과 급제, 둘째 동생 채정윤은 28세로 진사시 합격, 막내 채팽윤은 21세로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 평균 연령이 30대 중반이니, 삼형제가 모두 20대에 합격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다.
밥을 굶기면서 공부를 시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출세를 위해 공부를 하라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공부를 생업으로 여기는 태도다. 공부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직업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공부를 농사에 견주었다. 소리 내어 책 읽는 농사라는 뜻에서 설경(舌耕)이라고도 하고, 붓으로 글 쓰는 농사라는 뜻에서 필경(筆耕)이라고도 했다. 신라시대 최치원은 자기 문집을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라고 이름 붙였다. 붓으로 밭 가는 직업 글쟁이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온갖 직업이 있고, 공부도 그중 하나다. 공부가 취직을 위한 수단이 되면서 교육이 망했다. 공부 그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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