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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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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몇 년 전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을 받았을 때, 약간의 인지부조화에 시달렸다. 나도 한국인이자 봉준호 감독의 팬인지라 마음이 들뜬 한편으로, 빈부 격차 문제에 꽤 관심을 가져온 기자로서 이상한 박탈감 같은 게 느껴져서다.
빈부 격차와 불평등 문제를 소재로 영광을 차지한 감독, 배우, 그리고 제작에 관여한 재벌가 인사에게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사회와, 현실에선 양극화 완화에 그다지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 사회는 동일한 곳인가. ‘기생충’에 대한 폭발적 반응과 열정을 실제로 빈곤 문제 해결에 투입한다면, 빈부 격차가 이렇게까지 계속 커지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이 사회 곳곳의 고통은 ‘예술’의 연료로만 이용당하고 소비될 뿐인가. 한동안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을 발칵 뒤집어 놓은 현수막 시안 문구는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였다.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라는 문구도 있다. 이 문구들을 보고 든 첫 생각은 “아주 솔직하네”였다. 두 번째 든 생각은 “너무 솔직했네”였다. 모욕적이라는 반응과 비난이 빗발쳐서, 결국 민주당은 사과하고 시안을 철회했다.
그 문구들을 비하와 모욕으로 느꼈다는 반응을 보며, “사람들이 이게 모욕이라는 건 아는구나, 부끄럽다는 건 아는구나”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빈곤·노동·장애인 문제 해소를 위한 정책들이 수없이 좌절되는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본 입장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잘 사는 데만 관심 있고, 그걸 아주 떳떳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욕이란 걸 안다고 해서,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나의 단점이 무수하다는 걸 알지만, 그 단점을 글로 써서 누군가 걸어 놓는다면 모욕적일 것이다. 실제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매달리는 정책들을 살펴보면, 그 핵심 기저에는 저 현수막 문구의 논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소멸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서울 팽창 공약, 일회용품 사용 금지 정책의 철회와 탄소 저감 정책 외면, 극심한 세수 부족에도 중산층과 부유층을 위한 각종 감세 정책들을 보라. 그 와중에 장애인 단체들의 지난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동권 확보 등을 위한 권리예산은 무시당하고, 외국인노동자를 돕는 정부 센터들은 모두 폐쇄가 예고됐다. 이런 정책들에는 왜 ‘모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현수막의 문구를 실천하고 있는데 말이다.
정치권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나는 차라리 저 현수막이 거리마다 나부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공동체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부끄럽다”고 느끼고, 각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잘 살고 싶다고 해서,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둘 다 관심 있다”는 항변도 많을 것 같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우선순위가 항상 전자일 때, 후자를 위한 시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 악(惡)과 이기심은 본질은 다를지라도, 초래하는 결과는 대부분 비슷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벌써 표계산이 한창이다. 아마도 ‘나는 잘 살고 싶은’ 유권자의 마음에 수없이 어필할 것이다. 현수막 문구들에 불쾌했다면, ‘공동체’를 위해 때때로 ‘나’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스스로 물어야 한다. 최근 경실련에서 내놓은 현역의원 자질 검증 자료를 비롯해, 의원 평가 자료들은 상당히 많다. 정치권이 총선을 준비한다면, 유권자들도 총선을 준비해야 한다. 그 판단 기준이 “나는 잘 살고 싶다”의 벽을 깨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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