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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를 회복하면 큰일

입력
2023.11.23 07:30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피로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 정신이나 몸이 지쳐서 힘든 상태를 뜻한다. 피로를 회복하면 힘든 상태가 계속돼 큰일 날 수도 있다. 피로는 바로 해소해야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피로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 정신이나 몸이 지쳐서 힘든 상태를 뜻한다. 피로를 회복하면 힘든 상태가 계속돼 큰일 날 수도 있다. 피로는 바로 해소해야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밥 먹듯이 약을 먹는 친구가 있다. 기침만 해도 감기약을 먹고, 속이 좀 더부룩하면 소화제를 먹고, 머리가 살짝만 띵해도 두통약을 먹는다. 누구든 그와 만나면 약국에 꼭 들르게 된다. 지난주 이 친구 회사 근처에서 선후배들과 한잔했다. 음식점을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숙취 해소제를 먹어야 한다며 약국으로 데려갔다. 친구가 약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이 진열대를 살폈는데 눈에 들어오는 약 이름이 있다.

갱년기 보조제 ‘하노백’과 해열진통제 ‘암씨롱’. 하노백은 “한오백년을 사자는데 웬 성화요”의 민요 ‘한오백년’에서 따왔을 게다. 암씨롱은 ‘알면서’라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다. 언어 감각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고 강신호 회장이 이름 붙인 동아제약 제품이란다. 한글학자들은 우리말을 파괴했다고 항의할 만도 하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전문용어 중심의 외국어 제품명보다는 솔직히 정겹고 편안하다.

약국을 나오려는데, 단골이니 특별히 준다며 약사가 뚜껑 딴 박카스 한 병씩을 건넨다. 그러더니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날도 춥고 많이 피곤하시죠. 쭉 들이켜고 피로 회복하세요.“ 피로를 회복하라고! 나보고 골골거리란 말인가.

회복(回復)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니 회복될 대상은 긍정적인 말이어야 한다. 명예를 회복하고, 신뢰를 회복하고,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술자리가 많아지는 이맘때만 되면 여기저기서 피로를 회복하라고 난리다. 피로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 정신이나 몸이 지친 상태를 뜻한다. 그런 피로를 되찾으면 철인이라도 큰일 날 게다. 좋은 마음을 담아 말하는 ”피로 회복하세요“는 실제 전하고자 하는 뜻과는 정반대인, 모순된 표현이다.

피로는 해소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나 문제가 되는 상태를 해결해 없애 버리는 게 ‘해소’다. 갈등을 해소하고, 숙취를 해소하고, 스트레스도 해소해야 한다. 제약업계뿐만 아니라 언론도 피로회복제라는 표현을 버리고 피로해소제만을 써야 한다.

주당들을 지켜주고 풍요를 불러오는 신 바쿠스(Bacchus). 로마신화 속 바쿠스에서 따온 박카스 역시 강 회장이 ‘간장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담아 붙였단다. "약(藥)이라는 한자의 윗부분에서 초두(艸)를 빼면 즐거울 락(樂)이 된다"던 그의 말처럼 약이 생활에 즐거움을 줄 수도 있을까. 약은 과하게 의존해도 문제지만 너무 안 먹어도 탈이다. 일교차가 큰 환절기, 모두 건강하시라. 그러려면 피로는 회복하지 말고 해소해야 한다.


노경아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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