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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당측정기 들고 시험 봐요"… 막내가 65세, 늦깎이들의 수능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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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당 측정기는 챙겨가셔도 돼요. 근데 강한 향수를 뿌리거나, 도시락으로 삼겹살을 싸가선 안 되겠죠?
쌀쌀한 초겨울 공기가 코끝을 간질이던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일성여고에서 특별한 출정식이 열렸다. 2024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이틀 앞둔 만학도 수험생들에게 주의 사항을 안내하고, 합격 기원 떡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교실 밖 복도는 1년 먼저 시험을 치르는 선배를 위해 '엄마도 대학 간다' '떡 하니 붙으세요'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응원하는 후배들로 왁자했다.
일성여고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40세 이상 여성들이 고교 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학력인정 평생교육기관이다. 올해는 48~84세의 재학생 96명이 수능 원서를 냈다. 남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열정과 패기만큼은 '1등급'인 이들이다. 설렘과 기대가 교차했던 여고 교정에서 10명의 늦깎이 여고생들의 도전기와 수능 응시 소감을 들어봤다.
학구열이 뜨거운 일성여고에서도 이정분(66)씨는 소문난 '공부벌레'다. 2020년 2월 남편과 33년 일군 섬유공장을 정리하고 한달음에 달려간 곳이 일성여고 입학식이었다. "일만 하고 살아왔으니 주변에선 쉬라고 했어요. 하지만 한평생 제가 제일 하고 싶었던 건 공부거든요."
위기는 입학 3개월차에 찾아왔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다. 대학은 나중에 가더라도 항암이 끝나면 단둘이 여행을 다니자 약속했다.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반쪽이었기에, 정분씨는 남편이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날에도 마음을 다잡고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렀다. 성적은 전교권이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올해 첫날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져 그렇게 좋아하던 공부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런 정분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남편이 남기고 간 칭찬이었다. "항상 제 공부를 응원해줬어요. 자랑스러운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최고령 응시자인 김정자(84)씨도 어엿한 여고생이다. "다 늙어서 공부하면 뭐에 쓰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 그럴 때 마다 "84년 인생에도 새로운 경험을 한다"고 받아친다. 입학 후 간판에 적힌 한자와 영어를 척척 읽어내는 기분을 사람들은 알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한평생 가족 뒷바라지를 하느라 등이 굽은 정자씨지만, 노익장을 응원하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 또한 식구들이다. 공부의 목표는 미국에 사는 손자 손녀와 영어로 대화하는 것. "분홍색 가방은 며느리가 사줬고, 수능날 아침은 영감이 차려준대요. 제 인생이 바뀌었다니까요."
물론 노년의 분투가 쉽지만은 않다. 입 모양을 봐야 이해가 쉬운 영어는 감염병 사태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 되면서 발음을 따라하기 조차 어려웠다. 무역회사를 다니며 학업을 병행하는 조가은(69)씨도 가장 힘든 순간으로 '단어를 아무리 외워도 머리에 입력이 안될 때'를 꼽았다.
반면 '드라마 열혈 시청자'인 가은씨가 가장 재미있게 공부한 과목은 단연 역사였다. 가은씨는 "20년 전 '여인천하'를 열심히 챙겨봤는데, 수업 시간에 아는 내용이 나올 때 마다 신이 난다"면서 “옛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리다 보면 이해가 술술 됐다"고 웃었다.
결전을 앞두고 떨릴 만도 하건만, 수험생들은 수능이 끝나면 정든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더 큰 듯했다. 25년 전 다른 평생교육기관을 찾았다가 집안 사정으로 공부를 그만뒀다는 우영희(65)씨는 "선생님들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니 너무 좋아 이게 꿈인가 싶었다"고 눈물을 훔쳤다.
떡집을 운영하던 원용심(69)씨는 원래 공부에 뜻이 없었지만 친구의 설득으로 일성여고에 오게 됐다. 학교 입학을 살면서 제일 잘 한 선택이라고 말하는 용심씨는 이번에 건국대, 배화여대, 백석대 세 곳에 합격했다.
박순연(74)씨는 한자 공부에 열심이다. 2년 전에 황반변성을 진단 받고 입원을 권유 받았지만, "차라리 공부하다 죽겠다"며 마다했다. 순연씨는 아직 눈물이 나고 아플 때도 있지만 학교만 오면 힘이 난다고 한다. 그는 '나는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진다'는 좌우명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
이정학(68)씨는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아직도 수능 본다는 말을 안 했다. 중학교를 다닌 것도 졸업 할 때 말했다는 정학씨는 수능이 끝나면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갈 예정이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과학. 정학씨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관점도 넓어졌다"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하루 중 제일 좋다는 고명숙(73)씨. 그는 "학교를 다닌 후로 어깨도 딱 펴고 고개도 들고 다닌다"며 웃어보였다. 명숙씨는 "나이 많은 엄마들도 끊임 없이 배우는데, 젊은 사람들은 기회가 얼마나 많겠냐"며 청년들을 향해 "절대 포기하지마"라는 응원의 말도 남겼다.
김양자(70)씨는 "친구들 모임에서 글을 써야할 때면 '눈이 안 보인다'며 피했는데, 이젠 자신 있게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너무 늦었나' 고민하는 청년에게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른다.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도전해보라"라고 당부했다.
일성여고 2학년 신이자(70)씨는 내년 수능을 보는 '후배'다. 이날 출정식에서 반짝이는 응원용 수술을 들고 올해 수능을 치르는 선배들을 응원하던 신씨는 "엄마도 대학간다 일성여고 파이팅"을 거듭 외쳤다.
사실 이미 대부분 수시 전형으로 대학을 붙은 일성여고 학생들에게 수능은 필수 관문이 아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한 자리에 앉아 시험을 치르는 건 어린 학생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들이 손자 손녀뻘과 함께 하려는 이유는 한가지, 다시 한 번 '도전'을 하기 위해서다.
"We can do it! 공부를 망설이시는 분들, 나오세요. 나오면 자신감도 생기고 천국입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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