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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어금니서 신경마비 물질"... '칠레 저항 시인' 네루다 독살설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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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73년 9월 11일은 칠레 민주주의가 군홧발에 짓밟힌 날이다. 칠레 대통령궁 '라 모네다'는 자국 공군 전투기로부터 폭격을 당했다.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하다 바로 그날 죽음을 맞았다. 3년 전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출범한 사회주의 정부는 그렇게 무너졌다.
그로부터 12일 후, 칠레에서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 이 나라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당시 69세)가 9월 23일 사망했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탄 그는 아옌데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군부는 네루다가 1969년부터 앓고 있던 전립선암 때문에 숨졌다고 발표했다. 쿠데타로 절망한 탓에 병세가 악화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의 마지막 길에 모여든 추모객 1,800여 명은 외쳤다. "네루다와 함께, 우리는 아옌데를 묻습니다."
이후 칠레는 오랫동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피노체트의 군부 철권통치 17년간 약 4만 명이 감금, 실종, 살해, 고문, 강간 피해를 당했다. 1,469명은 지금까지도 '데사파레시도스(desaparecidos·실종자들)'로 남아 있다. 1,029명은 투옥 중 행적이 묘연해졌고, 나머지 377명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모두 가족들에게 유해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발생한 의문사 사건은 한둘이 아니다. 네루다 사망도 그중 하나다. 2011년 멕시코 잡지 '프로세소'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개인비서이자 운전사였던 마누엘 아라야가 "네루다는 군부에 의해 독살됐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네루다가 숨진 지 이미 38년이 흐른 후였다. 아라야는 "죽기 전에 내가 원하는 건 네루다가 살해됐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뿐"이라고 했다. 실제 네루다의 정확한 사인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다.
아라야는 네루다의 세 번째 부인 마틸데 우루티아와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인물이다. 쿠데타 발발 당시 칠레 수도 산티아고와 130㎞ 떨어진 바닷가 마을 이슬라네그라에 머물던 이들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 채 몸을 낮추고 있었다. 이튿날인 9월 12일 군인들과 해병대가 연달아 들이닥쳤다.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가택 수색을 벌였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칠레를 떠나는 게 네루다의 유일한 선택지였다"고 아라야는 말했다.
망명지는 멕시코로 정해졌다. 그곳에서 반독재 운동을 도모할 계획이었다. 루이스 에체베리아(1922~2022)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 네루다를 태울 비행기를 칠레에 보내기로 했다. 비행기 도착 때까지 산티아고의 산타마리아병원에 머무르려 했던 네루다는 9월 19일 구급차를 타고 이슬라네그라를 떠났다. 군부는 끈질기게 훼방을 놨다. 4~5㎞마다 군인들이 구급차를 멈춰 세웠다. 예정보다 3시간이나 늦었던 그날 오후 6시 30분, 일단 무사히 병원에 도착하긴 했다.
9월 22일 멕시코 대사관에서 "군사정권이 네루다의 출국을 허가했다"고 알려왔다. 출국 예정 날짜는 이틀 후인 24일이었다. 집필 중이던 미완성 회고록 원고를 갖다 달라는 네루다의 부탁으로 아라야와 우루티아는 23일 이슬라네그라로 향했다. 그런데 네루다가 홀로 병원에 남겨진 사이, 그만 사달이 났다. 두 사람은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갔지만, 그날 오후 10시 30분 네루다는 숨을 거뒀다. 망명을 실행하기 딱 하루 전이었다.
네루다 타살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 근거 중 하나는 바로 ①미묘한 시점이다.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받던 네루다는 새로 들어선 군사정권의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공산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으로, 대선후보 물망에도 오를 만큼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군부 입장에선 반정부 투쟁의 구심점이 될 그의 망명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구체적 근거도 있다. "그가 망명길에 오르면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질 것"이라는 군부 인사 발언(1973년 9월 22일 오전)이 기록에 남아 있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다. 네루다 사망 하루 전이었는데, 심지어 같은 날 오후엔 군 통제하의 라디오 방송에서 "네루다가 몇 시간 안에 사망할 것"이라는 발표까지 나왔다. 네루다가 멀쩡히 숨 쉬고 있던 때였다.
②미심쩍은 사인도 암살설을 부채질했다. 공식 기록상 네루다의 사인은 전립선암이 말기로 진행되면서 생긴 '암성 악액질'(cancerous cachexia)이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모습은 악액질 환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악액질은 아무리 칼로리를 보충해도 체중이 줄어드는 전신 영양 부족 상태를 야기하는데, 네루다는 '비만'이었다. 마르티네스 코르발라 당시 칠레 주재 멕시코 대사는 "사망 전날 본 네루다는 몸무게가 거의 100㎏에 달했다"며 "혼수상태에 빠졌거나 죽어 가는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네루다의 사인을 조사했던 캐나다 맥매스터대 고대DNA센터의 데비 포이너 연구원은 2017년 캐나다 CBC방송 인터뷰에서 "네루다는 숨질 당시 암 말기 단계에 있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덩치가 크고 과체중이었다. 사망 10시간 전에도 여전히 읽고, 먹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생전의 네루다가 스스로 ③"수상한 주사를 맞았다"고 언급했다는 게 아라야의 얘기다. 병원에 혼자 있던 네루다는 사망 당일 오후 4시쯤, 이슬라네그라로 전화를 걸어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의사가 들어와 배에 주사를 놨다. 빨리 와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라야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네루다는 고열로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배에는 붉은 얼룩도 있었다. 아라야는 "전날까지만 해도 네루다는 약을 복용하면서 상태가 매우 좋았다"며 "모두 알약이었고, 주사는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피노체트 정권에서 보낸 요원이 의사 행세를 하며 네루다의 복부에 독성 물질을 주입했다는 게 아라야의 주장이다.
게다가 의료진 중 한 명인 ④'닥터 프라이스'는 갑자기 증발했다. 네루다 담당 의사가 '프라이스'라는 이름의 인물로 바뀌었는데, 유족은 그의 사망 이후 닥터 프라이스를 다시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파악해 보니 산타마리아병원은 물론, 당시 칠레엔 '프라이스'라는 이름의 의사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병원에는 의료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당시 현지 언론들은 산타마리아병원이 네루다의 사인을 심부전으로 발표했지만, 실제 사망진단서에는 심부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네루다가 사망 몇 달 전 산티아고의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해당 병원에도 그런 기록은 없었다고 한다.
아라야의 폭로 이후, 네루다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네루다의 정확한 사인을 밝히려는 소송도 칠레 법원에 제기돼 있는 상태다.
칠레 사법부는 2013년 4월 8일 네루다의 유해 발굴을 명령했다. 같은 해 11월 칠레 정부 주도하에 사망 원인을 조사한 국제 법의학 전문가들은 "네루다는 독살이 아닌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40년 전 군부 정권 발표와 같았다. 이를 믿지 못한 네루다의 유족은 재조사를 요구했다. 2015년 5월 스페인 연구팀이 그의 유해에서 타살 증거가 될 수 있는 다량의 황색포도상구균 감염 흔적을 찾아냈지만, 칠레 정부는 "실험실에서 증식된 것"이라며 자연사 결론을 뒤집지 않았다.
그럼에도 네루다 암살설은 더 확산됐다. 2015년 11월 "칠레 정부가 네루다 사망과 관련해 '제3자의 연루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내부 문건을 작성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가 나왔고, 정부도 이 사실을 인정한 탓이 컸다. 2017년엔 맥매스터대와 덴마크 코펜하겐대 법의학자들이 '암으로 죽었다'는 정부 결론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조사 결과도 내놓았다. 유해의 어금니에서 발견된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눔'이 결정적 단서였다. 치명적 독소를 배출해 신경마비 증세를 일으키는 물질로, 생물학 무기에도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추가 검사 결과 보고서를 올해 2월 재판부에 제출했다.
소송 원고 자격으로 보고서 내용을 열람한 네루다의 조카 로돌포 레예스는 암살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라고 전했다. 그는 "보툴리눔이 유골에서 발견될 이유가 없다. 이것은 네루다가 암살당했다는 의미"라고 거듭 주장했다.
파올라 플라사 재판장은 보고서 내용을 검토한 뒤 네루다 사인에 대한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선고 시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자신의 생애 말년을 네루다 사인 규명에 바쳤던 아라야는 끝내 그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지난 6월 77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러나 진실을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유효 기한'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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