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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질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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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0분. 편집기자 출신 선배의 밥 한 끼 먹는 시간이다. 먹는다기보단 때운다는 표현이 어울릴 게다. 때운다는 말엔 음식에 대한 욕심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때가 되니 그냥 입에 넣는 거다. 30여 년 신문 마감 인생이 만들어낸 일종의 직업병이다. 정년퇴직을 한 지 3년. 느긋하게 먹을 만한데도 몸에 밴 속도는 도무지 줄지 않는다. 취재기자도 사진기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맛을 즐기다 ‘물먹는’ 일이 생길 수 있어 먹을 땐 늘 급하다.
교열기자 역시 직업병이 있다. 엘리베이터, 화장실, 공원, 전철 등에 붙은 광고나 현수막 속 문구를 대충 보는 법이 없다. 빨간색 펜을 가지고 다니며 일일이 수정하는 선배도 있다. 소설을 읽다 오자가 나오는 순간 현실 세계로 빠져나와 책장을 덮어 버린다는 후배는 여럿이다.
한 가지 일을 오래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행동에도 직업이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은 직업병을 “한 가지 직업에 오래 종사함으로써 그 직업의 특수한 조건에 의하여 생기는 병”이라고 설명한다.
직업병과 달리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질병이 있다. 몸 전체가 털로 뒤덮이는 ‘늑대인간증후군’, 피부에 나무껍질이나 비늘 같은 사마귀가 자라는 ‘나무인간증후군’, 정상인보다 수십 년 빠르게 늙는 ‘조로증’ 등이다. 보건복지부 희귀질환관리법은 유병(有病)인구가 2만 명 이하이거나 진단이 어려워 유병인구를 알 수 없는 질환을 ‘희귀질환’으로 정의하고 있다.
법도 질환도 명칭이 무척 거슬린다. 언론 역시 잘못 사용하는 말이 바로 희귀질환과 ‘희귀병’이다.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이 말이 왜 잘못됐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희귀병의 희(稀)는 ‘드물다’, 귀(貴)는 ‘귀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희귀병은 보기 드물게 귀한 병이다. 세상에 그 어떤 병을 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인도 모르고, 설사 안다고 해도 치료제가 없어 낫기 힘든 질병은 드물 ‘稀’에 적다는 뜻의 ‘소(少)’를 붙인 ‘희소병’ 혹은 ‘희소질환’이 적확한 표현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병마와 싸우는 이들에게 “희귀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건 또 다른 아픔을 줄 수도 있다.
영국 작가 알프레드 조지 가드너가 쓴 수필 '모자철학'의 마지막 문단은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우리는 각자의 취미나 직업이나 편견으로 물든 안경을 쓰고 인생의 길을 간다. (중략) 우리는 주관적으로 볼 뿐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사실(事實)이라고 하는 그 다채로운 것을 알아보려 할 때 거듭 실패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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