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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대국’ 동남아도 “아이 안 낳아”...합계출산율 1%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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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 베트남 남부 호찌민에 거주하는 직장인 레민후에(31)는 일곱 살 딸을 6년째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있다. 고향 타인호아가 호찌민에서 1,500㎞나 떨어진 탓에 딸을 서너 달에 한 번 정도만 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편과 후에 모두 회사에서 야근과 출장이 잦아 아이를 돌보기 어렵다. 어머니를 호찌민으로 모셔 와 함께 지내본 적도 있으나 10평 남짓한 주택에 성인 세 명과 아이 한 명이 살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2016년 6개월간의 출산휴가를 끝낸 뒤 복직했다가 노골적 퇴사 압박을 견디다 못해 회사를 떠났을 때,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다. 하나뿐인 딸을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기 위해 애지중지하는 딸과 떨어져 돈벌이에 집중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한 셈이다.
후에는 23일 한국일보에 “동생을 만들어 줄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포기했다”며 “정시 퇴근하거나 근처에서 누군가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둘째는 꿈도 꾸지 못한다”고 푸념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주로 형제자매가 서너 명 이상 있지만, 자녀는 한 명만 낳아 모든 것을 해 주자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덧붙였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주요 회원국들이 ‘베이비 버스트(baby bust·출생률 급락)’에 직면했다. 20세기 후반 높은 출생률을 바탕으로 10개국 인구를 모두 합쳐 6억5,000만 명에 이를 만큼 각각 인구 대국으로 성장했으나, 이제는 아기 울음소리가 줄어드는 지역이 늘면서 각국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저출생으로 오랜 기간 골머리를 앓아온 곳은 싱가포르다. 1975년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생각되는 평균 자녀 수)이 현재 인구 유지를 위한 최소 출생 규모(대체출산율)인 2.1명까지 떨어진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지난해에는 1.05명으로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태어나는 아이 수가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나지 않으면 자체적인 인구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학령 아동이 줄면서 초·중학교 통폐합이 싱가포르 교육부의 주요 업무가 됐을 정도다.
태국도 인구 절벽을 마주하고 있다. 2022년 태국 합계출산율은 1.30명이다. 유엔은 올해 한 명 이하로 주저앉을 것으로 예상한다. 블룸버그통신이 “세계 최초 개발도상국의 출생률 급감 현상”이라고 표현할 만큼 저출생이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엔 처음으로 ‘인구 데드크로스’(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많아지면서 인구가 자연 감소하는 현상)까지 겪었다. 태국 정부는 저출생 해결을 국정 과제로 삼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인구 1억 명의 베트남도 폭풍을 피해 갈 수 없다. 지난해 전체 합계출산율은 2.1명으로 이웃 나라들보다 양호하지만, 최대 도시 호찌민(1.39명)은 태국 수준까지 떨어졌다. 후에처럼 많은 청년이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저출생 국가인 한국(합계출산율 0.78명)에 비할 바는 아니나 아이를 낳지 않는 문제가 더 이상 선진국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의미다.
원인은 단순하다. 점점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세상이 돼 가고 있어서다. 2000년대 이후 동남아에서 빠르게 산업화·도시화가 이뤄지면서 사람이 몰리는 도시를 중심으로 집값, 생활비, 교육비가 치솟았다.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올해 태국의 자녀 교육비 평균 지출액은 1만9,500밧(약 76만 원)으로, 법정 최저임금 기준 한 달 치 월급(75만 원)을 쏟아부어야 한다. 높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20~40대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달 1일 태국 국가개발행정연구원이 성인 1,3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4분의 1이 양육비 부담 등을 이유로 비출산을 선택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활발해졌는데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가 부족한 점도 저출생을 부추긴다. 베트남 하노이의 정보기술(IT) 회사에 다니는 응우옌홍늉(31)은 “25세 때부터 부모님이 ‘결혼해서 아이를 가져라’라고 권했지만 전혀 생각이 없다”며 “혼자 벌어 즐기는 삶에 익숙해진 데다 친구들이 아이를 낳은 뒤 업무에서 배제되거나 재정적 문제를 겪는 것을 보고 가정을 꾸리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이 같은 베트남의 현실은 한국과도 꼭 닮았다. 근무 여건상 일·가정 양립이 어렵고, 불안정한 노동 환경이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다. 탄포린 싱가포르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아직까진 여성이 아이를 갖게 되면 경력을 이어가기 쉽지 않다”며 “이 때문에 차라리 직장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출산을) 미루기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가 입장에서 출생률 저하는 ‘재앙’이다. ‘생산가능 인구 급락→소비 여력 감소→경제 활력 저하’라는 연쇄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는 국가 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 동남아 국가도 예외는 아니다.
동남아는 지난 20여 년간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에 토대를 둔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경제발전 기틀을 마련해 왔다. 세계 각국도 ‘젊은 아세안’을 거대 시장으로 보고 생산 기지를 앞다퉈 옮겨 왔다. 데이비드 블룸 하버드대 인구학 교수는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서 “‘노동인구 증가’라는 동남아 인구 모델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 지역 경제성장에 30% 정도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머릿수’를 동력 삼아 경제 도약 채비를 갖춘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인구 감소로 성장 엔진이 꺼지고 세계무대 경쟁력도 사라질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영국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2019년 보고서에서 “동남아는 수십 년간 유연하고 숙련된 노동력에 힘입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는데, 저출생으로 위험에 빠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각국은 출생률 높이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내놓는 대책 역시 한국처럼 아이를 낳으면 돈 몇 푼을 쥐여 주거나, 학비 일부를 지원해 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원 웨이 탄 EIU 연구원은 “돈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낮은 출생률을 해결할 수 없다”며 “사회 시스템의 취약한 부분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해결하는 게 더 건강한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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