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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663억 부채로 건물 47채 매입... 정씨, 빚으로 바벨탑을 올렸다

입력
2023.10.24 11:00
수정
2023.10.24 11:0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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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왕 추적기: ②임대차계약서 538건 분석]
세류동에만 17채... 한 골목에서만 8채 소유
위임계약 천지에 계약날짜 없는 계약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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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이 수원에서 또 터졌습니다. 확인된 피해규모만 671세대(세입자)입니다. '정씨'라는 임대인이 수십 채 건물을 보유하며, 수백 건 임대차 계약을 맺으며 수백억 대 전세보증금을 긁어모았습니다. 정씨는 어떻게 이런 '부동산 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요? 정씨의 정체를 추적하고, 사기가 근절되지 않는 전세제도의 맹점을 짚어봤습니다.

지난 17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다세대주택 앞도로에서 '수원 전세사기 의혹' 사건의 피의자인 정모 씨 일가가 세입자들에 막혀 택시에 고립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다세대주택 앞도로에서 '수원 전세사기 의혹' 사건의 피의자인 정모 씨 일가가 세입자들에 막혀 택시에 고립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수원 전세사기'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정모(59)씨는 사실상 가족기업 방식으로 임대업을 운영했다. 아내와 아들을 시작으로 친인척과 지인을 총동원해 '전문 부동산중개소'까지 운영하면서 ①건물 매입 ②계약관리 ③건물 관리 등을 일원화했다. 정씨 일가가 소유한 것으로 파악된 건물만 47채에 달하는데, 이 건물 매수에 투입된 부채는 확인된 것만 무려 600억 원대에 이른다.


23일 한국일보가 경기 수원시와 화성시 일대의 정씨 일가 소유 다세대주택 등 건물 47건의 등기부등본을 전수분석한 결과, 시중은행 등에서 돈을 빌린 결과로 설정된 근저당권 규모만 663억 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 일가는 기존에 매입한 다세대주택을 지렛대로 삼아 최대한 부채를 끌어 왔고, 그 결과 적은 자본으로 많은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사실상 빚더미 위에 쌓아올린 '사상누각의 부동산 제국'이었다.

그래픽=김문중 기자

그래픽=김문중 기자

지역별로는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소재 건물이 17채로 가장 많았다. 세류동에는 한 골목에만 정씨 일가 소유 건물이 8채인, 소위 '정씨 골목'도 있었다. 팔달구 인계동이 10채, 권선구 권선동이 7채로 뒤를 이었다. 경기 화성시에도 진안동(4채), 봉담읍(2채) 등 총 6채가 정씨 일가 명의였다. 이외에도 영통구 신동(2채)·망포동(1채), 장안구 조원동(1채)·율전동(1채), 팔달구 우만동(1채) 등 정씨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건물을 사들였다.

이런 문어발식 '건물 쇼핑' 행태는 정씨의 처남 김모씨가 운영하던 A 중개소가 중개한 임대차계약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일보가 A부동산이 2014년부터 올해까지 중개한 임대차계약의 계약서 538장을 전수 분석한 결과, 이 중 81건 계약의 임대인 명의가 정씨 집안과 처가 등 일가족이었다. 이 곳은 일반적인 공인중개사가 아니라 정씨 일가 계약을 전담하는 '기획부동산'이었던 셈이다.

81건 중에는 정씨 명의 건물이 27건으로 가장 많았다. 아내 김모씨도 17건으로 뒤를 이었고, 김씨의 형부 차모씨 임대인 명의 계약도 19건이나 됐다. 정씨 아들 명의 건물 거래도 2019년부터 시작되는데, 정씨가 아들을 일가 사업에 합류시킨 시기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대부분 계약에서 임대인이 직접 도장을 찍지 않고 대리인이 나선 '위임계약' 형태가 발견된다는 점. 위임계약임에도 이를 계약서에 기록하거나 위임장 등을 첨부하지 않았다. 일부 계약서에는 계약일자를 기재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런 계약서상 하자로 인해, 피해 임차인들이 향후 손해배상 절차에서 '주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마저 있다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22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홍익표 원내대표와 함께하는 수원 전세사기 피해 청취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22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홍익표 원내대표와 함께하는 수원 전세사기 피해 청취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전세사기와 깡통전세 피해자들이 1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 및 정부의 지원대책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전세사기와 깡통전세 피해자들이 1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 및 정부의 지원대책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본보가 직접 피해자들에게 확인한 결과, 정씨의 비서 등 대리인에 의해 체결된 10건 이상의 위임계약 중 '위임계약'을 명시한 것은 단 2건에 불과했다. 법무법인 심목의 김예림 부동산전문 대표변호사는 "위임계약상 절차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며 "이 경우 임대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어 계약 관련 설명 등 의무를 지키지 않은 공인중개사 등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해질 수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정씨 일당은 2014년부터 임대업을 시작했지만, A 중개소에서 체결된 임대차계약의 절반 가까이(40건)가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던 2020~2022년 이뤄졌다. 다른 전세사기에서처럼, 전세와 매매가격 차이가 적은 '갭투자' 방식을 이용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루 2건 계약은 다반사였고, 2021년 2월 27일의 경우 하루에만 3건의 계약을 진행하는 등 '속전속결'로 임차인을 모집하는 행태도 보였다.

해당 부동산은 정씨 일가 외에도 수원 일대 다른 임대업자와의 계약도 중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임대업자들은 정씨 일가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수원 지역 부동산업계에선, 전세사기 의혹으로 지역 시장 자체가 위축되면서 다른 임대업자들도 정씨처럼 유동성 부족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수원 일대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임차인들이 하나둘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며 "정씨처럼 과도한 빚으로 부동산을 사들인 임대업자는 위기를 겪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이승엽 기자
오세운 기자
권정현 기자
정다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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