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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왜 배우냐” 했던 한국어… 이젠 명문대 입결 1위, 한국말 하면 월급 3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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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중학교 때 친구들에게 ‘진짜’와 ‘오빠’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어요. 낯선 언어가 신기하고 재미있어 유튜브에서 한국 관련 콘텐츠를 계속 찾아보다가 한국어 매력에 푹 빠졌고, 대학까지 오게 됐어요. 이제 한국어는 그 자체로 제 삶이에요.”
4일 베트남 호찌민국립대에서 만난 이 학교 인문사회과학대(인사대) 한국학부 4학년생 홍안(21)은 유창한 한국어로 이같이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은 한국 배우 유연석. 한국에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유연석이 나오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한국어 말하기와 듣기가 쑥쑥 늘었다.
‘아영’이라는 한국 이름을 앞세워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하는 유튜브 브이로그 채널도 운영한다. 베트남인이라고 밝히지 않으면 영락없는 한국 Z세대처럼 보인다. 옆에서 그의 말을 듣던 응우옌티푸엉마이(47) 학부장이 놀라며 말했다. “정말 세상이 좋아졌어요. 나라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공부하고 한국인과 소통할 수 있는 건 예전엔 상상도 못했거든요.”
마이 학부장은 한국-베트남 수교 2년 뒤인 1994년, 인사대 동양학과 안에 한국어과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학교를 다닌 ‘1기 입학생’이다. 당시 동기는 35명. 인터넷은커녕 마땅한 교재조차 없어 지도교수가 한국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책과 비디오테이프로 한글을 익히고 발음을 교정해야 했다. 한국어·베트남어 사전도 한 개밖에 없었다. 동기들과 시간을 쪼개 돌려보는 게 일상이었다. 한국 인지도가 낮은 탓에 “도대체 왜 한국어를 배우냐”라는 질문도 숱하게 들었다.
30여 년 만에 세상이 변했다. ‘비주류 학과’로 취급받던 한국어과는 2015년 한국학부로 승격됐다. 베트남은 물론, 동남아시아 최초였다. 현재 재학 중인 학부생만 770여 명이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인사대는 지난해 베트남에선 처음으로 한국어 석사 과정도 개설했다.
마이 학부장과 홍안은 각각 1994학번과 2020학번이다. 사제 관계이자 26년 선후배인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에서 한국어는 양국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튼튼한 다리라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은 전 세계에서 한국어 학구열이 가장 뜨거운 나라다. 교육 현장의 각종 지표는 이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2017년 23곳이었던 베트남 내 한국어학과 또는 강좌 개설 대학교는 현재 60곳으로 늘어났다. 전공자만 2만5,000여 명에 달한다. 한국어의 높은 가치를 가장 먼저 포착한 이들도 대입 수험생과 학부모들이다.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 결과, 매년 베트남 명문대가 발표하는 커트라인에서 한국어학과는 법대나 의대 입학 점수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베트남 하노이대의 경우, 올해 40점 만점에 36.15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호찌민 인사대 한국학부에 들어가려면 입학시험에서 영어 수학 문학 모두 A등급을 받아야 한다. 홍안 역시 영재고를 졸업해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입학했다. 입시 성적이 사회상을 반영하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은 지금 ‘한국어 전성시대’인 셈이다.
한국어 열풍은 공교육까지 바꿨다. 베트남 정부는 2021년 한국어를 제1 외국어로 지정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프랑스어와 같은 위상이다. 제1 외국어가 되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선택 과목으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
대도시 저학년생 학부모들이 수년간 교육훈련부에 “한국어를 정규 교과 과정에 편성해 달라”고 요청한 결과다. 일어 등 다른 언어는 제2 외국어에서 제1 외국어가 되기까지 10년이 걸렸는데, 한국어는 2020년 제2 외국어로 채택된 지 1년 만에 격상됐다. 한국교육원에 따르면 올해에만 9월까지 베트남 전역의 95개 학교에서 초·중학생 2만923명이 한국어 수업을 들었다.
일반인 대상 한국어·한국 문화 교육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세종학당재단의 세종학당도 베트남에서 22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전 세계 85개국의 세종학당 248곳 가운데 베트남이 가장 많다. 수강생 수(1만8,000여 명)도 최대 규모다. 학생부터 일반인까지, 모두가 한국어에 푹 빠져 있다는 얘기다.
한국어 열풍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케이팝(K-POP)과 한국 드라마·영화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국어=한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베트남에서의 상황은 결이 조금 다르다. 베트남의 한국어 인기는 한국의 소프트파워와 기업 진출 등 교류 증가에 따른 경제 현상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학창 시절 한국 문화 콘텐츠를 통해 한국어와 한글에 입문한 뒤, 성인이 되어선 ‘취업’을 위해 본격적으로 배우는 식이다. 베트남에 진출한 9,000여 개의 한국 기업, 또는 이들과 거래하는 베트남 기업에 입사하려는 목적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단계로 진화하는 것이다. 실제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 취업 필수 요건인 한국어능력시험(TOPIK·토픽) 응시자는 2014년 3,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4만1,327명으로 13배 이상 늘었다.
지난 4일 호찌민에 위치한 베트남 거점 세종학당에서 만난 수강생 권안(23)도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노래를 이해하고자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 여행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는 “맞춤법이 아직 어렵긴 하나, 한글은 조금만 공부하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글자라고 생각한다”며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토픽 점수를 딴 뒤 한국계 물류 회사에 입사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어는 ‘돈’이 된다. 베트남 대졸 초임은 800만 동(약 44만 원) 안팎이지만, 한국어에 능통하면 기대 급여는 1,600~2,000만 동(약 87~110만 원)까지 뛰어오른다. ‘영어를 구사하면 임금이 2배, 한국어를 하면 3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박성민 베트남 거점 세종학당 소장은 “유럽 쪽 세종학당은 낯선 동양의 언어를 배운다는 의미가 강하고, 남미는 케이팝 같은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한다는 ‘취미’로서의 배움이 주를 이루는데, 베트남에서 여기에다 취업 또는 비즈니스 목적이 더해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베트남 주재 한국 기업들로부터 좋은 학생을 추천해 달라는 문의도 많이 받는다”고 귀띔했다.
다만 베트남에서 한국어가 인기를 계속 이어가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현장에 있는 전문가들에게 어려움을 묻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교사와 교재 부족’을 꼽았다. 교원 수와 학습 자료 등 인프라가 한국어 배움 열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이 학부장은 “양질의 한국어 교육을 받은 이들이 학교에 남아 있지 않고 처우가 좋은 기업 등으로 가면서 현재는 초중급 정도를 가르치는 교사가 대부분”이라며 “양국 관계가 깊어질수록 교육의 양만큼이나 질도 끌어올리는 게 필수”라고 강조했다. 높은 수준의 강의를 할 수 있도록 교사 양성과 재교육이 필수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지화’도 주요 과제로 꼽힌다. 베트남 내 많은 한국어 교육기관은 한국 대학교나 정부가 전 세계 한국어 학습자를 대상으로 만든 한국어 교재를 활용한다. 그러나 한국계 회사 취업 희망 비율이 높은 베트남에서는 단순히 한글을 읽고 한국어를 말하는 수준만을 목표로 할 게 아니라, 이러한 현지 상황을 반영해 한국어 능력 향상을 도모하는 자체 교재를 개발하는 게 시급하다고 교사들은 말했다.
한국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문체부와 세종학당재단은 △베트남을 비롯한 전 세계의 세종학당 수와 전문 교원 파견 인력 확대 △학습자들 수준을 반영한 고급 과정 추가 개발 △국가별 상황을 고려한 현지화 등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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