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천주 믿으며 모여 산 이들은 왜…" 7번 퇴고로 완성된 이야기

입력
2023.09.23 04:30
11면
구독

김탁환 역사소설 '사랑과 혁명' 출간
원고지 6,000매 방대한 분량 안에
1827년 정해박해 전후 곡성 담아내
천주교인 감옥터 근처서 살며 집필
"조선 근대화 다룬…정치소설이기도"

19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사랑과 혁명'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탁환 작가. 그 방대한 분량을 7번이나 퇴고했다면서 "토할 것 같았다"고 농담을 했다. 해냄 제공

19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사랑과 혁명'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탁환 작가. 그 방대한 분량을 7번이나 퇴고했다면서 "토할 것 같았다"고 농담을 했다. 해냄 제공

"알고 싶긴 했습니다. 아가다는 왜 엄마에게 쌀을 계속 대줬는지, 당고개 주모는 왜 손해를 보면서까지 거지와 병자들에게 음식을 주고 잠자리까지 베푸는지, (…) 그녀들이 천주를 믿기 때문이라면, 천주란 과연 어떤 신일까, 궁금했습니다." ('사랑과 혁명' 1권 중)

'들녘'은 재주 좋은 농부였다. 제 땅은 아니지만 정성을 쏟았고 흉년에도 풍작을 이뤘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의 소작농에게 풍요는 가당치 않았다. 이웃 논에 독물을 풀어 홀로 풍작했다는 괴소문이 나돌고 땅 주인인 진사에게도 책잡혀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다. 관기 출신이자 삯바느질로 홀로 그를 키운 어머니까지도. 갈 곳 잃은 들녘이 향한 곳은 어려울 때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이들이 사는 교우촌이었다. 들녘, 세례명 이시돌 이야기의 시작이다.

조선은 신부가 들어오기 전 스스로 천주를 받아들인 나라다. 천주교사에서도 유례없는 일이다. 이방의 신을 어떻게 책 몇 권을 통해 믿고, 신분도 이름도 버리고 공동체(교우촌)에서 새 삶을 살 수 있었던 걸까. '불멸의 이순신' '허균, 최후의 19일' 등 역사소설로 유명한 김탁환(55) 작가가 이번엔 그들의 삶에 주목했다. 4년을 꼬박 매달려 원고지 약 6,000매 분량을 7번이나 퇴고한 끝에 '사랑과 혁명'을 냈다. 그의 서른한 번째 장편소설이다. 1827년 정해박해 당시 들녘과 같은 인물들을 수많은 사료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생생히 살려 냈다. 정해박해는 전라남도 곡성에서 시작해 한양까지 500여 명의 교인을 체포해 고문한 천주교박해 옥사다.

사랑과 혁명(전 3권)·김탁환 지음·해냄 발행·628, 488, 452쪽·각 1만8,800원

사랑과 혁명(전 3권)·김탁환 지음·해냄 발행·628, 488, 452쪽·각 1만8,800원

김탁환 작가는 지난 19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1820년대 곡성에 사제가 없이 평신도들끼리 마을을 이뤄 신앙을 지킨 일을 소설에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집필 초반 소설의 얼개는 박해 자체에 집중했었다. 그런데 20년간의 도시 생활을 접고 2021년 1월 곡성으로 집필실을 옮긴 일이 전환점이 됐다. "우연히 (박해 당시 천주교인을 가둔 옥터에 세운) 곡성성당을 방문했다가 천주교인이 갇혔던 감옥을 복원한 공간을 보고 감전된 것 같았다"는 것. 작가는 아예 성당 옆집으로 이사를 해 1년 넘게 소설을 썼다.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자연스레 1801년 신유박해로 지도부가 와해된 후 곡성까지 와서 마을을 만들고 살게 된 긴 시간과 정해박해 이후의 고통까지 아우르는 방향으로 작품 세계가 확장됐다.

총 3권의 소설 중 1권은 들녘 등이 교우촌에 들어가게 된 과정을 그렸다. 2권에서는 천주교인과 간자(스파이), 군관이 숨고 달아나는 추적의 시간을, 3권에서는 정해박해 이후에도 계속된 탁덕(신부를 이르는 옛말)을 모셔오기 위한 교인들의 움직임을 담았다.

김탁환 작가는 소설 속 농부 이름을 딴 '들녘의 마음'이란 책방을 2년 전 곡성에 직접 차려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만약에 ‘들녘’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읽었을 만한 책들로 꾸몄다"며 "앞으로도 곡성군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면서 고민하고 깨달은 것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해냄 제공

김탁환 작가는 소설 속 농부 이름을 딴 '들녘의 마음'이란 책방을 2년 전 곡성에 직접 차려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만약에 ‘들녘’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읽었을 만한 책들로 꾸몄다"며 "앞으로도 곡성군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면서 고민하고 깨달은 것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해냄 제공

종교소설로 규정하기엔 다분히 정치적이고 역사적이다. 무엇보다 들녘을 비롯한 인물들이 교우촌에서 살게 된 과정을 19세기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빼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있되 정치는 실종되고, 예절을 강조하되 극악과 무도가 판을 쳤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늪" 같던 현실이 그들을 '사랑과 혁명'을 부르짖게 밀어낸 상황을 작가는 정밀하게 썼다. 27년간 역사소설과 사회파소설을 오가며 쓴 작가의 연륜이 빛을 발했다. 정해박해의 특이성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곡성에서 단 한 명의 순교자도 없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다 보니 작가는 순교와 배교를 날카롭게 나누기보다는 "배교와 치명(순교) 사이, 교우 마을과 외교인 마을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깊이 들여다보는 데 애썼다. 작가 스스로 신작을 천주교소설이라 말하지 않는 이유다.

소설은 안팎으로 이야기의 힘을 말한다. 이야기는 암흑 속에도 걸어갈 수 있게 하는 밧줄과도 같다. 천주교 성인(聖人) 이야기를 담은 '성인전'은 당시 현실에 무너진 이들을 이끌었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인 '치명록'을 차용, 인물 '장구'가 그 이야기를 모아 쓰는 액자형 구성도 그런 점을 강조한다. 김탁환의 새 이야기 역시, 20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는 힘을 보여준다.

진달래 기자
문이림 인턴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