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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 위해 호랑이 코를 지지기까지...‘외화벌이’에 희생되는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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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지난 15일 베트남 하노이 중심가의 한 동물원. 코끼리 우리에 다가가자 “찰그락 찰그락, 팽” 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렸다. 60~70세로 추정되는 암컷 코끼리 ‘타이’와 ‘바낭’의 뒷다리에 묶인 쇠사슬이 끌리며 나는 소리였다.
이들이 무거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콘크리트와 연결된 2m 남짓 길이의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 움직임을 막았다. 타이와 바낭은 멈칫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걷기를 포기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타이와 바낭이 베트남 중·남부 고지대에서 동물원으로 옮겨진 것은 각각 2010년과 2014년이다. 이들에겐 사육사를 따라 좁은 우리를 몇 바퀴 도는 짧은 산책만 허락됐다. 나머지 긴 세월은 쇠사슬에 각각 한쪽 다리가 묶인 채 지내왔다.
동물원에 갇힌 코끼리들에게 자유를 주자는 목소리가 그간 베트남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달에도 국제 동물보호 단체 '애니멀 아시아'와 현지 동물옹호 단체 '베트남 애니멀아이스'가 하노이 시 당국에 “코끼리를 옭아맨 쇠사슬을 풀어 주고 동물원이 아닌 중부 고지대의 넓은 국립공원에서 생활하게 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서명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동물원 측은 “코끼리를 이제 와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면 먹이를 구할 수 없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반대한다.
타이와 바낭은 동남아시아 동물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여주는 극히 일부의 사례일 뿐이다. 태국 방콕의 백화점 옥상 동물원에는 35년째 갇혀 있는 '백화점의 마스코트' 고릴라 부아노이가 있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늘 무기력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부아노이는 쇼핑객들의 유흥거리로 소비된다.
동물들은 외화벌이 수단이다.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이 과거 관광 코스였다면, 이제는 '동물 체험’이 인기를 끌고 있다. 코끼리를 타고 정글을 오가는 관광 상품이 대표적이다. 사람 입장에선 체험이지만 동물 입장에선 학대이고 착취다. 그러나 코끼리 트레킹은 어느새 동남아 여행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동남아에서 동물 학대 관광 상품이 성행하는 건 결국 돈벌이 때문이다. 관광 인프라는 열악하고 야생 동물은 흔하니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물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동물 복지'라는 개념도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글 트레킹 상품에 이용되는 코끼리는 한 번에 최대 성인 6명을 태우고 하루 10시간 넘게 쉼 없이 이동해야 한다. 2017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사람을 태우던 코끼리가 40도 넘는 무더위에 제대로 쉬거나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 탓에 죽었다.
올해 초에는 혹사당한 끝에 척추가 내려앉은 태국 코끼리 사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코끼리의 등은 원래 위로 볼록하게 솟아 있지만 71세 암컷 코끼리 파이린의 등은 아래로 움푹 파여 있었다. 25년간 매일같이 관광객을 태우고 다닌 탓이다. 파이린은 ‘관광 상품’으로써 가치가 떨어지고 나서야 자유를 찾았다.
인간처럼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끊임없이 사진을 찍어야 하는 오랑우탄,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는지 코로 붓을 쥔 채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는 코끼리 등을 동남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맹수와의 스킨십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많은 동물원들이 사자, 호랑이와 '셀카'를 찍을 수 있다고 홍보하며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관광객들은 맹수를 끌어안고 사진을 찍거나 고환을 움켜쥐는 등의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동물보호 단체는 이 과정에서 동물원 측이 동물들의 공격성을 줄이기 위해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법 마취까지 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훈련받은 동물이라도 사람과 접촉하면 경계하기 마련인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올라온 사진 속 동물들은 대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 본부를 둔 동물 권리 보호 단체 '레이디프리싱커'는 태국의 한 동물원에서 직원들이 호랑이 코 아래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관광객들이 호랑이와 사진을 찍을 때 고개를 숙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수많은 동물들이 ‘오락용’으로 전락해 사진 소품으로 동원되는 셈이다.
세계 최대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의 엘리사 알렌 부사장은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 동물원의 맹수들은 일찍 어미와 떨어진 뒤 휴식 시간이나 제대로 된 영양 섭취 없이 사진 촬영을 강요당한다”며 “이후 너무 늙어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호랑이술 등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고 영국 인디펜던트에 말했다.
올해 초 세계동물보호단체(WAP)가 선정하는 글로벌 동물보호지수(Animal Protection Index)에서 동남아 국가 중 태국은 D등급, 미얀마와 베트남은 F등급을 받았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아예 집계조차 안 됐다. 지수는 A~G 등급으로 분류되는데, A에 가까울수록 동물 복지가 뛰어난 나라다.
고무적인 것은 동물 착취에 대한 동남아 안팎의 시선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4월에는 디즈니 영화 ‘인어공주’에서 주인공인 에리얼 역을 맡은 미국 배우 할리 베일리가 태국 방콕의 동물원을 방문했다가 미국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해당 동물원은 동물을 잔혹하게 훈련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일부이지만 ‘가치소비’를 즐기는 소비자가 늘면서 관광 업계도 변화에 나서고 있다. 베트남 남부 닥락주(州)는 2018년 국립공원 안에서 코끼리 트레킹을 금지했다. 몇 시간씩 사람을 태우고 오가는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대신 코끼리들이 서식지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등 종 보존과 교육 측면을 강화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일부 여행사가 동남아 관광 프로그램 중 코끼리 트레킹 체험, 우마차 탑승, 악어 쇼 관람 등을 퇴출하기로 했다. “동물을 혹사시키는 것 같아 여행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여행객들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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