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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항상 자문한다, 내게 과연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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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모임, 강의… 자료 수집은 취미
조금이라도 성장해야 살아있다 느껴”
“우리 하루를 살아도 에지 있게 살자고요.”
(드라마 ‘스타일’, 박 기자)
포털 사이트에서 ‘김혜수’를 치면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당당함’이다. “당당함의 아이콘” “당당함이 매력” “당당함이 아름다운 배우”….
많은 여성에겐 롤모델이다. 수십 년간 여성이 메인MC 자리를 지키고, 남성이 서브MC인 행사는 그가 서는 ‘청룡영화상’뿐이다. 그는 어디서나 독보적이다.
그의 ‘당당한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대중은 ‘김혜수’ 하면 가장 먼저 당당함을 떠올릴 거예요. 그 태도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그 말이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다녔어요. 만든 건 아니죠. 만든다고 당당해질 수도 없는 거고. 내가 당당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시종일관 당당할 필요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뭐, 매번 내가 당당하겠어요? (웃음) 그런데 난 이게 정말 중요해요.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 자리에 내가 나갈 자격이 있는가, 준비가 돼 있는가. 이걸 항상 생각해요. 나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이죠.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자격을 갖추고 했나’ 되짚어 봐요.”
-100회까지 이어진 인터뷰 쇼, ‘김혜수의 플러스 유’ 때부터 이미 당당했죠. 그때 불과 스물여덟 살이었어요.
“그랬더라고요. 그 프로그램에서 사람들 얘기 듣는 게 참 좋았어요. 말하자면, 나와서 얘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자리잖아요. 큰 행운이었죠. 그것도 매주 한 명 이상을. 그때 내가 일지를 썼더라고요.”
-일지요?
“이사하면서 발견했어요. 누가 나와서 어떤 말을 했다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그 말에 내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썼더라고요. 무언가 자격을 갖춘 사람의 말을 통해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던 거죠. 그런 게 정말 좋았어요.”
그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부각된 짧은 영상이 그것이다. 10대의 그가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또래의 배우 하희라와 나란히 앉아 인터뷰하는 장면이다. 목소리만 등장하는 남성 인터뷰어는 이렇게 물었다. “사이즈 좀 공개할 수 있어요? 신발 사이즈 말고.” 명백한 성희롱이다.
소녀 김혜수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잠시 입가의 미소를 지우곤 남성 인터뷰어를 주시했다. 이내 그는 웃으며 “몰라요”라고 답했다. 카메라까지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 이상의 대처가 있었을까. 영상엔 “미개한 질문” “화가 치미는 성희롱”이란 비판 댓글과 함께 “무례한 사람 앞에서도 어릴 때부터 현명한 혜수 언니” “눈빛으로 제압부터”란 감탄이 이어졌다.
-그 영상을 본 적 있나요.
“친구가 보내줘서 봤어요. 그때는 그런 게(성희롱 발언) 만연할 때죠. 우리 나이의 자녀가 있을 법한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잖아요? 그때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폭력적인 질문이었죠.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예요. 그 1초 남짓 째려보는 김혜수가 대단한 게 아니라 그 시대를 보여주는 영상인 거죠.”
-평소 공부 모임도 한다고 들었어요.
“토론 모임을 두 개 했어요. 주로 사회 이슈나 환경 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모임이었어요. 읽어보고 좋았던 도서를 서로 추천하기도 했고요. 클래식 음악 강의를 10년 정도, 대중음악 강의도 5년쯤 들었어요. 인문학이나 대중문화 강의도 지속적으로 들어왔죠.”
-바쁜 일정 중에 강의까지 듣다니 대단해요.
“강의는 작품 촬영이 없을 때 꾸준히 듣는 편이에요. 아니, 촬영 기간이라 하더라도 마치 혈당 떨어지듯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강의를 듣고 와야 해요. 좋은 강의 정보에 늘 귀가 열려 있어요. (미소)”
-아침에 눈 뜨면 정치ㆍ사회 기사부터 본다고도 했죠.
“과거엔 종이 신문을,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죠.”
-토론 모임에, 강의에, 뉴스까지… 눈과 귀를 열어놓으며 사는 이유는요?
“좋아요, 재미있어요.”
그에게 성장 욕구는 본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 모든 것이 ‘배우 김혜수’를 만들었을 테다.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느니 엉망이 되더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어?”
(드라마 ‘시그널’, 차수현)
그와 함께 작업해본 감독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 배우의 성실함에 혀를 내두른다. 영화 ‘차이나타운’(2015)으로 데뷔한 한준희 감독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배우 김혜수씨는) 영화에 어울리는 의상 콘셉트를 정할 때도 하루에 사진을 100장씩 보내면서 함께 상의하고 고민했죠. 그러면서 우리가 동의에 이른 게 ‘중요한 건 멋있지 않았으면 좋겠다’였어요.”
-매 작품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쏟으면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진 않아요. 그러면 행복할 수도 있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하다고는 할 수 있을까요? 그 (후회도, 미련도 없을 정도로 다 쏟아부은 수준) 비슷하다고 하기에도 양심이 없는 거지만, 그 순간에는 다 쏟아붓긴 하죠. 정말 최선을 다해요. 그런데 본인의 한계를 본인이 알 수는 없잖아요. 내 한계를 현실적으로 정확히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을 수 있겠죠. 어떤 면에선 그것도 축복이에요.”
그는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혹은 작품과 상관이 없더라도 관심 있는 자료를 모아둔다. 이사하면서 외장 하드가 손상되긴 했지만, 축적한 데이터 양이 테라바이트 단위였다.
-수집한 자료의 양이 엄청나네요.
“시대별로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1920년대, 50년대, 70년대 자료가 많은 편이에요. 작가, 화가, 건축가, 정치가까지 분야별로 영향력이 있거나 제가 관심 있는 인물들 위주로 자료를 모았죠. 음악, 미술, 건축, 가구, 조명, 인테리어, 패션, 사건, 사고… 뭘 위해서가 아니라 관심 있는 자료를 모으고 보는 걸 아주 좋아해요. 오래된 취미죠.”
-평소에도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작품을 할 때는 더 열정적으로 자료를 찾으며 몰두하는데, 지치진 않나요.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어요?
“아우, 나는 그런 태도로 사는 건 생각하지 못해요. 일이든, 아니든.”
-특별히 잊지 못하는 작품은 뭔가요.
“최근 작들은 다 잊지 못해요. 옛날 작품은 옛날이라 기억이 안 날 뿐. 최근 몇 년 사이 작품 중에선 ‘시그널’이에요. 김원석 감독님한테 크게 배워서죠. 나는 ‘시그널’ 전에도 열심히 했고 그때도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란 걸 알았어요. 최선이라는 건 내가 선을 정해놓고 거기까지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이후로 스스로 최선을 갱신하는 내적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죠.”
-김원석 감독의 무얼 보고 배운 건가요.
“아주 여러 가지예요. 예를 들면, 연출자가 작품 전체를 총괄해야 하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음악, 음향, 편집, 녹음, 자료 같은 정말 많은 부분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분은 다 관여해요. 모르면 배우고요. 나는 보통 작품 할 때 감독한테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바로 문자 메시지로 보내도 되나요. 너무 시간이 늦거나 이를 땐 주무실 수 있으니까 답 안 주셔도 돼요. 혹시 나중에 잊어버릴까 봐 보내려는 거예요’ 하고 물어요. 그럼 감독들이 대부분 좋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김원석 감독은 새벽 3시건, 4시건 문자를 보낼 때마다 늘 즉각 답을 하더라고요. 유일했죠. 그건 안 잔다는 거잖아요. 거기다 편집이건 음악이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라고 의견을 내면 ‘아, 그건 이래서 이렇게 한 거예요’ 해요. 다 알고 있다는 거죠. 그걸 보면서 ‘아, 이런 게 최선이구나’ 깨달았죠. 김원석 감독에겐 그게 당연한 거였어요. 그때 각성했어요. 그러면서 또 한 번 (작품 임하는 태도가) 달라졌죠. 그래봤자 기본을 하는 거지만.”
-기본의 수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니에요?
“사람이 그렇잖아요. 연기를 하면 주인공을 하고 싶어 하고, 기자도 이왕이면 메인 기사를 쓰고 싶어 할 테고요. 그런데 그러려면 감당해야 하는 거죠. 그럴 수 있는 자산이 적으면 메워야 하고요. 그걸 하지 않고 돈도 받고, 사랑도 받고, 칭찬도 받고… 그런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말이 안 되잖아. 운이 좋아 잠깐 그럴 수는 있겠죠. 40년 가까이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니 내게는 그게 기본이에요. 저보다 훨씬 역량이 좋은 배우가 많은데도 이렇게 오래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이렇게 느리게 성장하는 배우임에도, 이렇게 긴 시간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속도가 중요한 건 아니죠, 성장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난, 성장하지 않으면 죽을걸요. 성장이 가장 중요해요. 무언가 긍정적인 자극과 영향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에요. 0.1㎜라도 성장해야 살아있다고 느껴요. 정체돼 있으면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인생에서 중요한 게 ‘행복이냐, 불행이냐’가 아니라 ‘재미있느냐, 아니냐’예요.”
-실패란 뭘까요. 김혜수만의 경험과 언어로 정의해본다면.
“실패했다는 건 최소한 ‘했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중요해요. 머릿속에 있는 거? 말로만 하는 거? 중요하지 않아요. 해야죠. 실패해도 돼요. 실패가 없는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훨씬 낫죠. 실패는 가능성이니까. 실수하고 실패하더라도 결국은 그게 삶의 원동력이 돼요. 나는 성공이 아니라 성장이 목표인 사람이에요.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고.”
그는 한때 “배역보다 김혜수가 더 보인다”는 비판도 들었다고 했다. 그게 나쁜 말일까. 곱씹어 봤다. 어쩌면 대중은 ‘김혜수가 보이는 배역’이라서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이날 인터뷰 사진을 찍은 강영호 작가는 그와 14년 된 친구다. 1999년 처음 만났지만 2009년 그가 강 작가의 개인전을 찾으면서 친구가 됐다. 강 작가의 결혼식 사회를 자처하고, 강의를 듣는 모임도 함께한다.
강 작가는 말했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 연예계 인물과 일을 많이 했지만,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진 건 김혜수씨가 유일하다”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바로 답했다. “보통 연예인들은 일이 끝나면 관계도 끝나요. 혜수씨는 그렇지 않았어요. 먼저 연락했고, 먼저 챙겼죠. 비즈니스가 아닌 인간으로 날 대한 거예요. 필요에 의해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혜수씨는.”
이 인터뷰를 하게 된 것 역시 혜수씨 덕분이다. 그는 ‘실패연대기’를 두고 “댓글까지 다 읽을 정도로 좋아하는 인터뷰 연재”라고 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도 주제와 시기, 장소, 사진을 두고 여러 달에 걸쳐 상의하고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그런 과정의 즐거움을 누린 건 온전히 그의 공이다. 그런데도 그는 “인터뷰하러 나오기 직전까지도 ‘이 코너에 나갈 만한 자격이 되는가’ 고민이 됐다”고 했다.
그는 ‘과연 난 어떤 연기자인가. 연기에 쏟아부은 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자문에 답을 찾는 데 실패했다고 했지만, 그 답은 이 인터뷰에 알알이 각인돼 있을 듯하다. ‘배우 김혜수’의 의미는, ‘사람 김혜수’에 있다고.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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