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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쿠르 강국, 입시 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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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올해 초 영국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의 마스터클래스(유명한 연주자가 재능이 뛰어난 학생을 일대일로 가르치는 수업)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슈베르트 해석에 탁월한 전문가로 디아파종·그라모폰 등 여러 음반상을 수상한 연주자다.
피아노 전공생의 하이든 소나타 연주를 들은 루이스는 “좋은 연주”라면서도 “예쁘게 잘 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장난기 많았던 하이든이 작품에 담은 의도는 ‘슬며시 사람 뒤로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듯’ 청중을 놀라게 하는 것”이라며 “음악이 어떻게 전개될지 관객이 예측하지 못하도록 연주해야 한다”고 했다. 장난치듯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가며 연주 시범을 보인 루이스의 메시지는 ‘개성을 담고, 뻔한 연주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국은 음악 콩쿠르 강국이다. 조성진(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임윤찬(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등 아이돌급 연주자 외에도 수많은 콩쿠르 우승자들이 배출됐다. 올해만 해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바리톤 김태한)와 차이콥스키 콩쿠르(바이올린 김계희, 첼로 이영은, 성악 손지훈) 1위를 한국 음악가들이 휩쓸었다.
유튜브로 콩쿠르 중계를 들어보면, 한국 음악가들의 실력이 ‘평균 이상’이란 걸 느낄 수 있다. 실수도 적고 안정된 연주를 들려준다. 루이스 앞에서 연주한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잘 칠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으니.
그런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제 콩쿠르에 입상해도 예술가의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세계 무대에서 연주 기회를 얻거나 독창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려면 탄탄한 연주 실력에 개성과 창의성이 더해져야 하는데, 콩쿠르는 그것까지 키워 주진 않는다.
‘살아 돌아온 파가니니’로 평가받는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는 그의 책 ‘젊은 예술가에게’에서 개성이 충만한 연주자가 환영받지 못하는 콩쿠르의 현실을 꼬집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참가자(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부문)들의 연주를 들어봤는데, 독창적인 연주를 선보여 속으로 점찍었던 음악가들은 우승이 아니라 모두 4위(그중엔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도 있다)에 그쳤다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기대하지 않은 것, 예기치 않은 것,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역설한 크레머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연주자들을 한 줄로 세워 등수를 매기는 콩쿠르에서 개성이 강한 연주자는 마지막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인 김선욱(리즈 콩쿠르 우승) 손열음(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 문지영(부조니 콩쿠르 우승)을 키워낸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클래식 강국’이 아니라 ‘콩쿠르 강국’에 불과하다”고 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에는 개성과 창의성이 필요한데 이를 키우는 것이 과제라고도 했다. 그는 “과거엔 정형화된 연주를 좋은 것으로 여겼지만, 요즘 세계적인 추세는 ‘뻔하게 연주하지 말고, 제발 나를 좀 놀라게 해보라’는 식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콩쿠르 강국’의 성과와 한계는 우리 교육의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 학생의 생각과 잠재력을 묻고 평가하는 대신 정해진 답을 실수 없이 잘 고르는 능력을 우대하는 게 우리 입시다. 음악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경제 산업 전 분야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개성 있는 인재’를 요구하는데, 우리 교육은 문제풀이 능력을 기준으로 줄 세우는 데만 집착한다.
‘콩쿠르 우승자’ 배출이 음악계의 목표가 아니듯, ‘입시 강자’를 키우는 게 교육의 목표가 될 순 없다. 창의적인 예술가를 키우듯 학생들의 개성과 잠재력에 주목하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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