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기에 가짜총 들고 "돈내놔"... '어설픔'의 연속이었던 우루과이인 강도

한국말 못해 장난감 총에 번역기로 "돈 줘"
주점서 3만원, 이후 편의점서 50만원 탈취
주머니 돈다발 꽂고 다니다 3시간만에 검거

경찰이 수거한 편의점 총기 강도에 사용된 장난감 총기. 전북경찰청 제공

21일 전북 익산시 한 편의점에 총을 든 외국인 강도가 나타나 현금 50만 원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벌어졌다. 총기강도 신고에 발칵 뒤집힌 경찰은 즉시 출동 최고 단계인 ‘코드 제로’를 발령해 추적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범인을 붙잡고 보니 범행 과정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우루과이 출신으로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30대 남성 A씨는 휴대전화 번역기를 사용해 강도 행각을 벌였고, 사용된 총은 마트에서 구매한 장난감 총이었다. 국내에서 총기 범죄가 흔치 않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그는 300명의 경찰이 자신을 쫓는 줄도 모르고 태연하게 범행 현장에서 멀지 않은 길거리를 걷다가 3시간 만에 체포됐다.

"병원비 마련 위해 우루과이서 한국으로"

25일 한국일보 취재 등을 종합하면 A씨는 경찰 조사에서 “할머니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A씨 어머니는 25년 전 한국 남성과 재혼해 국내에 살고 있지만, 그의 친할머니와 두 동생은 우루과이 현지에 거주 중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재혼 후 가족들과 왕래를 아예 끊어 할머니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는 총기 강도로 병원비를 마련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작년 11월 입국했다. 이를 위해 예술ㆍ홍보 관련 비자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경찰에도 자신을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입국 직후 한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고, 모델과 광고업에도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 영화에 출연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일단 경찰은 A씨가 실제론 국내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뺏은 53만원

A씨는 범행 전날 익산에 위치한 한 대형마트에서 장난감 권총 1정과 장난감 소총 4정, 표적판 1개 등을 현금을 주고 구매했다. 장난감 총기의 경우 실총으로 오인되는 걸 막기 위해 주황색 등의 장식물이 붙어있는데 이를 모두 떼어내거나 금박으로 감싸 위장하는 나름 치밀함(?)도 선보였다. 범행 당시엔 권총을 사용했고 나머지 장난감 총기는 모두 주거지에서 발견됐다.

범행 당일 그는 오후 6시쯤 익산시 모현동의 한 술집을 먼저 찾았다. 한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하지만 첫 시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안녕하세요”와 같은 간단한 인사말을 제외하면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는 휴대전화 통역기를 꺼내 외투 안에 감춰둔 권총을 보여주며 술집 주인을 위협해 현금 3만 원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첫 범행에서 자신감(?)을 얻은 A씨는 1시간 뒤 주거지 인근 편의점을 찾았다. 음료수 한 병을 계산대에 올려 두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 마찬가지로 번역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직원에게 자신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자 외투 안에 감춰둔 권총을 보여주며 협박하기도 했다. 총을 본 직원이 놀라 휴대전화를 만지자 만류하는 손짓을 했다. 직원이 현금을 내놓지 않자 답답하다는 듯 휴대전화 번역기에 요구사항을 다시 적었다. ‘돈을 달라’는 협박 내용이었다. 여러 차례 손짓과 휴대전화를 통한 통역 끝에 현금 50만 원을 갈취했다. 남은 돈을 더 달라는 듯한 손짓을 했지만 계산대에 동전만 남은 걸 확인하고는 들고 온 음료수도 둔 채 다급히 밖으로 도망쳤다.

“주머니에 돈다발” 비번이던 경찰에 체포

그가 간과한 건 국내에선 총기 강도 범죄가 흔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코드제로를 발령하고 특공대 등 가용 가능한 300명 이상의 인력을 투입됐다. 편의점 폐쇄회로(CC) TV 영상 분석과 함께 용의자의 사진이 전 경찰에게 배포됐고, 주변 지역도 샅샅이 수색했다.

이 같은 전혀 알지 못했던 A씨는 개인적으로 복용할 약을 구매하기 위해 범행 현장으로부터 2, 3㎞ 가량 떨어진 약국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약국 인근에서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자신의 집으로 향했고, 범행 발생 3시간 만인 오후 10시쯤 한 은행 건물 인근에서 일대를 수색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A씨를 체포한 건 익산경찰서 중앙지구대 소속 여경 소지현(30) 경장이었다. 소 경장은 전날 야근 당직 근무를 서고 휴식 중 비상 연락을 받고 팀원 4명과 함께 범인 수색조에 투입됐다. 긴급 배치 장소로 향하던 소 경장 일행 옆으로 수상한 행색을 한 외국인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 A씨는 범행 때 입은 흰 외투와 선글라스는 착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바지 주머니에 돈다발이 튀어나와 있었다.

총기 강도범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게 상식적이진 않지만, 찜찜했던 경찰들은 가던 차량을 다시 되돌려 A씨를 불심검문했다.

통역사를 연결해 검문하던 중 소 경장이 A씨 주머니에서 돈다발을 꺼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소 경장이 재빨리 범인의 손목을 꺾고 뒤로 젖힌 뒤 제압, 수갑을 채워 현장에서 체포했다. 검거 당시 A씨의 소지품 중에는 범행에 사용한 장난감 권총이 있었다. 또 주거지에선 범행 사용 목적으로 구매한 다른 장난감 총기도 발견됐다.

경찰을 잔뜩 긴장시킨 총기 강도 파동은 이렇듯 다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다만 여전히 몇 가지 의구심이 남는다. 그가 정말 할머니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영화에 출연한 예술가라는 주장은 사실인지, 저런 허술한 계획으로 진짜 범행에 성공할 거라 본 것인지 등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일단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자세한 사건 경위를 조사 중이라 자세한 언급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그는 다시는 한국에 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경찰 관계자는 “국내에서 처벌당하면 본국으로 강제 송환돼 이제 입국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익산= 김진영 기자 wlsdud4512@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