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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받은 페이퍼클립 과학-공학자는 전무했다

입력
2023.08.28 04:30
수정
2023.08.28 14:2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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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 페이퍼클립 작전의 전범들- 2

페이퍼클립 작전의 나치 학자들 중 유일하게 재판정에 섰던 로켓공학자 게오르크 리카이. 위키피디아

페이퍼클립 작전의 나치 학자들 중 유일하게 재판정에 섰던 로켓공학자 게오르크 리카이. 위키피디아

나치 공학자 게오르크 리카이(Georg Rickhey, 1898.8.25~1966)도 페이퍼클립 작전의 수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치 부헨발트 멸절수용소의 부속 수용소였던 미텔바우-도라의 노동력으로 V-2로켓 등을 생산한 미텔베르크 군수공장 총책임자로 나치의 ‘기사십자무공훈장’까지 받은 자였다.

1931년 입당해 제국 군수부에서 활약한 그는 44년 4월 미텔베르크를 맡아 V-1비행폭탄과 V-2로켓 생산라인을 직접 구축했다. 그는 노동력 즉 수용소 인력의 공급 주체인 나치 친위대 및 게슈타포와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처형 등을 참관하기도 했다. 그는 가혹한 노동 강도로 폭탄 생산량을 증대한 공로로 게슈타포 창설자이자 나치 공군 총사령관이던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전후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에 수용돼 로켓공학자로 일했고, 전시범죄 혐의가 드러나 47년 독일로 송환됐지만 재판에서 모든 혐의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페이퍼클립 과학자 중 전범 혐의로 재판이나마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또 다른 로켓공학자로 미 항공우주국(NASA·나사) 원년부터 60년대까지 활약한 아서 루돌프(Arthur Rudolf), 베른하르트 테스만(Bernhard Tessmann), 나치 공군 항공의학연구소장을 지내고 강제수용소에서 나치판 생체실험을 자행한 혐의까지 받았지만 전후 나사의 우주복 설계 등을 주도하며 훗날 ‘우주 의학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칭호까지 얻은 후베르투스 슈트루크홀트(Hubertus Strughold) 등이 모두 ‘페이퍼클립 작전’의 수혜자였다. 페이퍼클립 작전은 케네디 집권기인 1959년 공식 종료됐다.

한편 미국보다 한발 늦긴 했지만 구소련도 46년 ‘오소아비아킴(Osoaviakhim) 작전'을 통해 소련 점령지 나치 과학자와 가족 약 6,000여 명을 모스크바 등지로 이송해 활용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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