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수호자" 또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입력
2023.08.17 04:30
수정
2023.08.17 09:4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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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디트리히 폰 콜티츠

1942년 무렵의 나치 장군 콜티츠. 그는 나치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로 불렸고, 프랑스 시민들에겐 '파리의 수호자'라 불렸다. 위키피디아

1942년 무렵의 나치 장군 콜티츠. 그는 나치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로 불렸고, 프랑스 시민들에겐 '파리의 수호자'라 불렸다. 위키피디아

2차대전 연합군이 프랑스 파리를 포위 압박하던 1944년 8월 17일, 파리 시장 피에르 떼땅저(Pierre Taittinger)가 점령군 사령관이던 나치 장군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1894~1966)에게 면담을 청했다. 떼땅저는 콜티츠에게 ‘파리를 지켜 달라’고 간청했다. 파리의 유서 깊은 건축물과 문화재들을 파괴하지 말아 달라는 거였다.

앞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을 잿더미로 만든 장본인이 콜티츠였다. 1차대전서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콜티츠는 명령에 죽고 사는 전형적인 ‘프러시아 장교’로 불렸고, 히틀러 역시 서부전선의 핵심인 프랑스를 맡길 만큼 그를 신뢰했다. 당시 히틀러의 명령은 명료했다. “파리가 폐허가 될 때까지 적의 손에 넘어가게 해선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콜티츠는 8월 25일 별 저항 없이 파리를 연합군에 넘겼고, 히틀러의 대반격-탈환 명령에도 불복했다. 히틀러에게는 “에펠탑을 제외한 파리 전역이 사실상 폐허”라고 허위 보고했다.

그는 전쟁포로로서 다른 수감자들에게 ‘배신자’라는 오명과 모욕을 견디며 미국 미시시피주 클린턴 수용소에 1년 남짓 수감됐고, 전범재판에서 정상이 참작돼 ‘부역자’ 범주에 포함됐다. 재판정에서 그는 “어떤 처벌도 좋다. 다만 나를 추종자로 심판하지 말아 달라. (…) 나는 군중을 따른 적 없고 언제나 그들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그는 1년여 옥살이 후 47년 석방됐고, 독일 바덴 인근에서 가족과 함께 월 675달러 연금을 받으며 말년까지 궁핍과 고독 속에 살았다.

그의 불복종 이유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다. 다만 50년대 발표한 ‘파리는 불타는가’라는 자서전에서 그는 “히틀러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판단했고, 파리를 파괴하면 전후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낳으리라 여겼다”고 밝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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