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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와 한국 현대사의 8월 15일

입력
2023.08.15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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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육영수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피습 직후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피습 직후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8월 15일은 역사적인 하루다. 1945년 그날 2차대전 전범국 일본이 항복했고, 참혹했던 전쟁이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일본 천황은 NHK 라디오 전국방송을 통해 육성으로 항복을 고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고하고자 한다.” 천황은 하루 전인 8월 14일 연합군 측에 먼저 항복의사를 전했고 방송사 기술팀을 궁으로 불러 약 4분 30초 분량의 저 연설을 녹음했다.

인류 역사는 하지만 8월 14일보다, 또 일제가 항복문서에 공식 서명한 9월 2일보다, 유사 이래 인류의 기쁜 함성이 가장 크게 울렸을 저 날을 종전 기념일로 친다. 한국을 비롯한 일제 식민지 국가의 8월 15일은 해방-광복의 날이고, 대다수 연합국 참전국들의 ‘대일전승기념일’이다. 인류는 오늘 다양한 의식과 행사로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평화의 가치를 환기한다.

8월 15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1974년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총에 숨진 날이기도 하다.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육영수는 1950년 육군 소령 박정희와 결혼, 1남 2녀를 두었고 5·16 군사쿠데타와 집권-장기집권의 들머리까지 박정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육영수를 중심에 둔 평전은 드물지만, 알려진 바 그는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공적 역할에 충실하고자 다방면의 전문가들에게 교육을 청해 받았고 육영사업과 빈민 구제 등 사회봉사에도 헌신했다. 박정희의 난잡한 사생활과 잦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여러 차례 직언을 서슴지 않아 권력 하수인들로부터 ‘청와대 내 제1야당’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스러짐으로써 한국 현대사는 박정희와 유신권력에 대한 값진 증인 한 명을 잃었고, 한반도는 평화-화합의 길에서 오히려 멀어지며 비이성적 반공-대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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