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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DNA’도 선생님에겐 겸손했다

입력
2023.08.11 18:00
수정
2023.08.11 22:0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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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사무관 학부모의 황당 갑질
조선시대 왕세자, 스승 극진히 예우
무너진 교육 바로 세워야 미래 가능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교육부 사무관이 자녀의 초등학교 교사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편지.

교육부 사무관이 자녀의 초등학교 교사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편지.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니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서 말해 달라.’

한 교육부 사무관이 자녀의 초등학교 교사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이 사무관은 무리한 요구도 모자라 담임을 교체할 수 있다고 협박했고 실제로 아동학대로 신고해 교사가 직위 해제된 것으로 전해졌다. 편지엔 ‘또래 갈등이 생겼을 때 철저히 편들어 주세요’, ‘반장, 줄반장 등 리더 역할을 맡게 되면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칭찬은 과장해서, 사과는 자주 진지하게 합니다’ 등 당부인지 명령인지 헷갈리는 수칙도 담겼다. 학부모와 학생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만큼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지만 교육부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해 해당 사무관을 직위 해제했다.

왕조 시대도 아닌 21세기의 교육 공무원이 ‘왕의 DNA’를 운운한 건 황당하고 생뚱맞아 헛웃음만 난다. 그래도 자녀가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길 바라는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할 구석은 있다. 부모 눈엔 모든 자녀가 왕자와 공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 자식이 귀하면 남의 집 자식도 똑같이 귀한 법이다. 다른 이를 존중하며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할 학교인데 자기 자식만 특별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극단적인 이기심의 발로다.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보다 망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 부모 세대는 선생님께 자녀를 더 엄하게 가르쳐 달라고 당부하곤 했다.

아이가 평범하지 않은 경우라면 조금 더 신경 써 주길 요청할 순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이 선생님한테 더 잘하는 게 상식이다. 예를 다해 스승을 모시고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숙여도 모자랄 판에 직권을 남용해 협박했다면 학부모를 떠나 공무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소양과 자격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공무원에게 백년지대계인 교육 정책을 맡기고 있다는 게 부끄럽다.

왕세자입학도첩 중 수폐도

왕세자입학도첩 중 수폐도

정작 조선시대엔 왕도, ‘왕의 DNA’를 물려받은 왕세자도 스승을 깍듯이 모신 게 우리 문화다. 1817년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를 그린 6폭의 ‘왕세자입학도첩’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서 왕세자는 명륜당의 서쪽 계단으로 올라 선생님(박사)에게 두 번 절하고 무릎을 꿇은 채 수업을 청한다. 동쪽 계단으로 오른 박사는 왕세자의 청을 두 번 사양하다 수락한다. 해가 뜨는 동쪽이 상석이다. 스승이 왕세자보다 높다는 얘기다. 또 성균관 박사 앞엔 책상이 놓여 있지만 왕세자 앞엔 책상이 없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왕세자는 수업을 듣는 동안 바닥에 엎드려 책을 봐야 한다. 배움 앞에서는 왕세자도 겸손해야 했다. 왕세자의 최고 스승인 사(師)도 정1품 영의정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는 바뀌었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를 동격으로 보고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군사부일체’를 지금 외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그래도 변하지 말아야 할 건 있다. 스승을 하늘처럼 모신 그 뜻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지난달 서울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사망과 6년간 극단적 선택을 한 공립 교사가 100명도 넘는다는 통계는 더 이상 선생님들의 절규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촉구하고 있다. 오랜 기간 얽히고설킨 교육계의 난맥상을 쾌도난마처럼 풀 해법은 없다. 오히려 성급한 조치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공감대를 거치는 건 필수다. 다만 선생님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교육이 바로 서지 않은 국가의 미래를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 교사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싶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박일근 논설위원

박일근 논설위원


박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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