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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 나카무라' 이미지를 깨라... 대한민국 여경 시초는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광복 78주년]

입력
2023.08.15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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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증언으로 본 여성경찰의 시조들

1956년에 촬영된 서울여자경찰서 단체 사진. 경찰박물관 제공

1956년에 촬영된 서울여자경찰서 단체 사진. 경찰박물관 제공


"조국이 이렇게 좋구나. 나도 조국의 부름을 받아 무슨 일이든 할 결심이 되어 있었다."

(1946년 경찰전문학교 시절을 회상한 전창신 경감)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갓 열 달이 된 1946년 6월. 고된 경찰학교 훈련에도 다섯 아이 엄마 전창신(1901~1985)의 눈은 반짝였다. 열두 살에 독립군에 입대한 이후 늘 품었던 소망, 바로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던 꿈이 마흔다섯 나이에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느라 옷은 늘 땀과 흙투성이였지만, 그의 마음은 왜경, 순사라고 멸시받던 경찰 조직을 내 손으로 바꿔보자는 책임감으로 가득했다.

1946년 경무부(미군정의 경찰조직)에서 처음 모집한 여자 경찰간부시험에 지원한 전창신. 그는 18세에 함흥영생여고 교사로 일하면서 3·3운동(함흥의 3·1운동)을 주도하다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경찰전문학교 졸업 후 1기 여자경찰간부(경사)로 임용된 그는 서울 중부경찰서 보안계, 서울여자경찰서 보안주임 등을 거쳐 인천여자경찰서장을 역임하며 경감까지 진급했다. 미군정 때인 1947년 설치된 여자경찰서는 △여성신체 수색 △여성 범죄 정보 수집 △여자유치장 관리 △전쟁고아 보호 △청소년 지도 업무 등을 전담하는 곳이었다.

전창신 경감. 경찰청 제공

전창신 경감. 경찰청 제공

고 전창신 서장의 아들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명예이사장은 8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항상 자주색 경찰 정복에 가죽 가방을 메고 아침 8시면 집을 나섰다"면서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한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는데, 어린 나이인 저로서는 늘 집을 비웠던 어머니가 밉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해방 이후 혼돈에 빠진 조국의 질서를 지키려 경찰에 투신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 서장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태극기와 선언문을 제작·배포해 3·1 운동을 주도했던 고등학생, 상하이와 부산을 오가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했던 전달책까지. 대한민국 여경의 뿌리는 누구보다 앞장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애국지사들이었다.

민주경찰 초석 다진 여성경찰

1940년대 후반 여자경찰 간부 후보생들이 훈련을 받고 있다. 경찰청 제공

1940년대 후반 여자경찰 간부 후보생들이 훈련을 받고 있다. 경찰청 제공

14일 경찰청에 따르면, 해방 이후 경무부(미군정의 경찰조직) 여자경찰국 소속으로 활동했던 여성경찰은 약 250명 규모로 추산된다. 서울, 인천, 대구, 부산 등 4개 여자경찰서에 각 수십 명의 여경이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경의 역사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에 시작된다. 당시 미군정은 미군 주둔 지역 내 풍기문란 단속을 위해 여자경찰제를 도입했다. 부랑아와 고아 등 아동 청소년 관련 업무를 전문으로 할 인력도 필요했다.

광복 후 여자경찰 연혁. 그래픽=김문중 기자

광복 후 여자경찰 연혁. 그래픽=김문중 기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일제 부역자' 취급을 받던 경찰의 이미지를 여경 채용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당장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제의 조선인 순사들을 군정경찰에 그대로 흡수했는데,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했던 순사들이 광복 이후에도 권력을 휘두르자 시민들이 따를 리 없었다. 경찰 조직이 국민 신뢰를 얻기 위해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이듬해 6월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신설됐고, 간부후보 16명을 처음 선발하면서 한국에 첫 여성경찰관이 탄생했다. 이후 여경 1기생 64명이 훈련을 마치고 현장에 투입되면서 본격적인 여경 시대가 열렸다. 여경 조직은 점차 확대돼 1947년에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4개 도시에 여자경찰서가 창설됐다.

초기 여경의 다수가 독립운동가

9일 부산 사하구 자매정신요양원에서 문숙희 원장이 양한나 서장의 생전 모습이 담긴 자료 사진을 보이고 있다. 부산=최다원 기자

9일 부산 사하구 자매정신요양원에서 문숙희 원장이 양한나 서장의 생전 모습이 담긴 자료 사진을 보이고 있다. 부산=최다원 기자

주목할 점은 당시 여경 대다수가 항일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경찰은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애국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해방 전후 한국애국부인회, 조선여자국민당 등 여성단체에선 "함께 경찰에 투신해 나라를 위해 일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대표적 인물이 최초의 여성 경무관인 황현숙(1902~1964) 전 치안국 여자경찰과장이다. 황 경무관은 17세였던 1919년 충남 천안에서 3·1운동을 계획, 태극기 수백 장을 제작한 뒤 광명학교 재학생 80명을 인솔해 만세를 외쳤다. 그는 일본 헌병에 체포돼 공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안맥결(1901~1976) 전 서울여자경찰서장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5개월간 구금됐다. 1920년대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결백단의 임원으로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양전(1911~미상) 전 부산여자경찰서장은 경성여고보 동기들과 비밀단체를 만들어 3·1운동에 참여했고, 일본 유학 시절 경찰의 요시찰 대상에 등재돼 감시를 받았다.

양한나(1893~1976) 초대 서울여자경찰서장은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밀항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부산을 오가며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일부러 치마를 여러 겹으로 입어 그 안에 돈을 숨겼다. 양 서장의 조카손자며느리 문숙희 부산 자매정신요양원장은 "혹시 들통이 나더라도 옷이 여러 겹인 틈을 타 자결하시겠다는 각오였다"며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어서 그런지 한 번도 발각된 적은 없었다"고 전했다.

강단으로 무장했던 여경의 시조새들

독립운동가 출신 여자경찰들. 그래픽=김문중 기자

독립운동가 출신 여자경찰들. 그래픽=김문중 기자

독립운동가 출신답게 당시 여경들은 소위 '한가닥하는' 경찰관들이었다. 후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나 사회운동가로서 뛰어난 리더십과 추진력 등을 갖고 있었다. 양 서장의 조카손자 우정훈 자매정신요양원 정신과 전문의는 "한마디로 장군, 여걸이셨다"며 "길거리에서 노상방뇨를 한다거나, 담배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으면 무섭게 호통을 치시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늘 하시던 말씀이 '일본을 넘어서야 한다'였다"며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그 영향으로 부산교대 교수였던 아버지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해직당하셨다"고 말했다.

전창신 서장의 아들 김상헌 이사장은 "어머니를 따라 광화문에 있던 서울여자경찰서(현재 미국대사관 자리)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 있던 여경들의 분위기에 압도됐던 기억이 있다"며 "특히 양한나 서장님은 키도 크고 목소리부터 카리스마가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치안활동 일선에서 맹활약

전창신 전 인천여자경찰서장의 아들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명예 이사장이 지난 8일 서울 성동구의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전창신 전 인천여자경찰서장의 아들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명예 이사장이 지난 8일 서울 성동구의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당시 여자경찰서는 여성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사건이나 풍기문란 단속이 주요 업무였다. 성매매 단속, 청소년 지도·보호, 범죄 정보 수집 등에 여경들이 대거 배치됐다. 거리의 고아와 부랑아들을 보살피는 것도 여경의 몫이었다. 평일 오후 3시면 중형트럭을 몰고 서울 시내를 돌면서 고아들을 거둬 아동보호소에 맡기는 것도 여경들의 일이었다.

사창가나 마약굴 소탕 작전에서도 여경이 선두에 나섰고, 가정 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여경이 출동했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경찰 조직에 여경이 등장하면서, 가정폭력이나 여성·소년 사건의 '감수성'이 부쩍 향상되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에도 경찰은 남성 경찰관이 여성 신체를 수색하는 것을 금지하고, 여성은 반드시 여자경찰서에 수용하도록 했다. 또 여성 관련 사건에는 반드시 여경이 참여하도록 하는 등 수사절차에서 높은 수준의 젠더 의식을 반영했다.

"어머니(전창신 서장)는 독립운동할 때 자기를 잡아갔던 형사를 경찰서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불과 몇 년 전 원수였던 두 사람이 이젠 동료가 된 거죠. 그때 그 형사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답디다. '유구무언이올시다'라고."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명예이사장)

그러나 대부분이 독립운동가 출신인 여경들의 활동 반경이 커지자, 일제 경찰 출신이 많았던 경찰 수뇌부와 마찰이 커져갔다고 한다. 몇몇 여경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체포해 고문했던 형사와 같은 사무실을 쓰는 일까지 있었다.

양한나 서장은 장택상 수도경찰청장과 갈등을 빚었는데, 1947년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강경 조치 등을 이유로 파면됐다가 여경들의 구명 운동으로 사직 처리됐다. 전창신 서장도 1951년 일제 경찰간부 출신인 이익흥의 치안국장 부임에 반발해 사표를 던졌다.

사회운동가로, 엄마로 '제2의 인생'

1950년대 초 양한나 서장(왼쪽)과 자매여숙 생활인 모습. 자매정신요양원 제공

1950년대 초 양한나 서장(왼쪽)과 자매여숙 생활인 모습. 자매정신요양원 제공

이후 여자경찰서는 급속한 도시화로 치안환경이 변화한 데다, 관할 중복 문제가 겹쳐 1957년 모두 폐지됐다. 여자경찰서가 사라진 뒤 초기 여경들은 사회운동가로, 어머니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양한나 서장은 경찰을 그만두고 부산에서 사회사업을 하던 중 전쟁고아를 양육하기 위한 자매여숙을 설립했다. 고아원이었던 자매여숙은 이후 자매정신요양원으로 이름을 바꿔 정신질환 여성을 위한 전문요양시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정훈 전문의는 "당시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고아, 정신질환자, 성 노리개 취급받는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다"며 "어찌 보면 한국 최초의 사회복지사셨던 셈"이라고 말했다.

전창신 서장은 세브란스병원 세탁부에서 20여 년간 일하며 일제 고문 탓에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홀로 다섯 명의 자녀를 키워냈다. 안맥결 서장은 1961년까지 경찰전문학교 교수로 일하다가, 5·16 사태 이후 군사정권의 합류 권유를 거절하고 퇴직했다.

경찰, 독립유공 경찰역사 찾기 계속

1950년대 여자경찰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1950년대 여자경찰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경찰은 광복 전후 문헌 기록을 조사하며 독립유공 경찰관 역사를 발굴하는 중이다. 경찰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둔 2018년 안맥결, 양한나, 이양전 등 초기 여경의 독립유공자 심사를 요청했지만, 안맥결 서장을 제외한 대부분이 근거자료 부족 등을 이유로 서훈이 보류됐다.

경찰은 지속적인 문헌 조사 등을 통해 근거 자료를 확보하는 대로 서훈을 재신청하겠다는 계획이다. 김근국 경찰청 경찰역사기록TF팀장은 "경찰청은 관계부처와 협업하여 서훈을 지속 추진할 것"이라며 "국가유공 경찰관을 계속 발굴하여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제대로 기억·존중받을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승엽 기자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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