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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선 그렸으니 내 바다"...중국 '남해구단선 횡포'에 무기력한 동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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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1940년대 중국이 남중국해에 일방적으로 그은 가상의 해상 경계선 ‘남해구단선(南海九段線·nine dash line)’이 동남아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중국 해군이 한국 서해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거나 배타적 경제수역(EEZ) 중첩 구역을 넘나들어 영해 주권을 침해하는 것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70년 전 그어진 정체 모를 선 때문에 중국에 ‘앞바다’를 빼앗기게 생긴 탓이다. 영유권이 경제적 이익은 물론 국가 안보와 연관된 만큼 양보 없는 싸움을 시작할 태세다.
아시아·태평양 외교안보 전문가인 칼라일 세이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27일 한국일보와의 화상인터뷰에서 “중국의 남중국해 야욕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주권 분쟁에 불을 붙이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 불안정을 야기하고 있다”면서도 “정작 아세안이 하나로 똘똘 뭉치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남해구단선이 무엇인지, 아태 지역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지를 그에게 물었다.
세이어 교수에 따르면 남해구단선은 중국이 남중국해 관할권 경계를 표시한 9개의 선이다. 모두 이으면 알파벳 '유(U)'자 형태가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인 1947년 당시 국민당 정부가 11단선을 담은 공식 지도를 제작·출판한 게 시작이다. 그는 “1949년 수립된 지금의 중국 정부가 1952년 하이난섬(하이난다오)과 베트남 사이의 통킹만에 있는 선 2개를 삭제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며 “350만 ㎢에 이르는 남중국해 해역 90%가 이 선 안쪽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남해구단선은 수십 년간 남중국해 갈등의 불씨였다. 동남아 중심부까지 파고든 이 선은 여러 국가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침해한다. 배타적 경제수역은 유엔해양법 협약에 따라 영토(연안 또는 섬)로부터 200해리(약 370㎞)까지 인정된다. 선 안에는 스플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군도, 베트남명 쯔엉사군도), 스카보러 암초(중국명 황옌다오, 필리핀명 파나타그) 등 필리핀과 베트남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섬들이 포진해 있다.
영토 분쟁은 국가 간 법적 공방으로도 번졌다. 필리핀은 2013년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근거해 중국을 상대로 중재를 요청했다. 2016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만장일치로 “중국의 남해구단선 주장에는 아무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하며 필리핀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PCA 판결은 원칙적으로 항소 대상이 아니며 결과를 준수해야 하지만 강제력이 없어 실효성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세이어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되레 중국은 2000년 전부터 중국 영해였다는 역사적 권원을 주장하며 국제기구 결정을 무시했고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비난했다”며 “판사 5명 가운데 아프리카 가나 출신이 있는 것을 이유로 ‘아프리카인이 아시아 앞바다에 대해 뭘 아느냐’고 모독했다”고 말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그대로다. 중국은 동남아 각국 배타적 경제수역 획정 근거가 되는 유엔해양법 협약이 1982년 체결된 만큼 자신들이 훨씬 먼저 선포한 남해구단선을 유엔이 제한할 수 없다며 PCA 결정을 비웃는다. 각종 출판물과 방송 등에서 중국이 주장하는 남해구단선이 여전히 등장하는 이유다.
중국은 왜 국제사회와의 충돌을 감수하며 남해구단선 주장을 꺾지 않을까. 세이어 교수는 ‘지정학’을 이유로 꼽았다. 남중국해는 세계 주요 해상 교통로다. 세계 원유 교역량의 3분의 1, 액화천연가스(LNG) 절반 이상이 이곳을 통과한다. 전체 물동량은 3조4,000억 달러에 달한다. 또 전 세계 어족 자원의 12%를 차지하는 수산물의 보고이며, 최대 300억 톤에 이르는 원유와 16조 ㎥의 천연가스도 품고 있다. 사실상 ‘경제 생명선’인 만큼 쉽게 양보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적극 추진해온 일대일로 전략의 핵심이 남중국해다. 남중국해와 말라카해협, 인도양,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 벨트’를 구축하려면 남중국해 사수가 필수다. 세이어 교수는 “중국은 남중국해 문제를 항의하는 국가에 육해공군은 물론 불법 어선까지 동원해 반복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며 “바닷길을 선점하기 위한 극단적 민족주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노골적인 국제법 위반에 속이 타는 쪽은 남중국해를 두고 신경전을 펼쳐야 하는 국가들이다. 아세안이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하지만 ‘차이나 머니’ 영향력이 큰 탓에 중국에 반기를 들기도 쉽지 않다.
아세안은 2018년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 확대를 막기 위해 ‘남중국해 행동강령(COC)’ 작업에 나섰지만, 5년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 분쟁 당사국은 영유권 강화를 주창한 반면, 중국의 입김이 강한 라오스, 미얀마는 미온적인 탓이다. 세이어 교수는 “2016년 PCA가 결과를 발표했을 때도 필리핀과 베트남만 환영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는 중국이 협박으로 입에 재갈을 물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해구단선을 둘러싼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의 신경전은 역시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세이어 교수는 중국이 앞으로도 회색지대 전략을 통해 베트남과 필리핀 등에 지속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봤다. 회색지대 전략은 전쟁을 직접적으로 일으키지는 않지만, 주변국에 위험을 줄 수 있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다.
중국이 군사력을 동원해 노골적으로 공격하진 않더라도 민간인을 가장한 해양경비대 등을 통해 아세안을 천천히 압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세이어 교수는 “아세안 개별 국가와 중국의 격돌은 소년 럭비팀이 성인 프로팀과 맞서 싸우는 격”이라며 “안타깝게도 당장 아세안이 효과적인 대응에 나서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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