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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대로보다 꿈꾸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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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무슨 책을. 그것도 새삼스럽게. 그냥 살던 대로 살아."
그가 정년퇴직 후 독서 모임에 나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했던 말이다. 어쩌면 그도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퇴직 후 독서 모임에 나가 소설을 읽고 인문교양서를 읽는다면 뜬금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 또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자 독서 모임이라면 또 모를까.
독서 모임에 나오기 전, 그는 미리 책방을 찾아왔다. 퇴직 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그런데 그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 일단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겠다, 그중 하나가 책 읽기라서 한 번 해보겠다, 라고.
독서 모임에 등록한 그는 매주 월요일 오전, 책방에 왔다. 오전 독서 모임 참가자는 그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 그는 한쪽에 앉아 주로 경청했다. 자신이 말할 차례가 됐을 때는 비교적 짧게 말했다. 얼마 후 그는 치앙마이로 한 달 살기를 떠났다. 예정됐던 것이지만 나는 조금 염려스러웠다. 그동안에도 남성 몇이 다녀간 적이 있다. 그들처럼 그도 왠지 곧 떠나지 않을까.
이후 평일 낮, 그가 책방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다음 독서 모임에 읽을 책을 찾았다. 그의 환한 얼굴만큼 내 낯빛도 환해졌다. 몇 번 모임에 나온 후 그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에 나선다고 했다. 무려 50여 일. 걷기 여행을 하면서 그는 두세 번 단체 카톡방에 소식을 올렸다.
이윽고 걷기 여행을 마친 그는 다시 독서 모임에 나왔다. 그리고 말했다. 독서 모임이, 사람들이 자꾸 생각난다고. 참 이상한 일이라고.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평소 말이 없던 그가 지난 독서 모임에서는 말을 많이 했다.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을 흥미롭게 읽은 그는 다른 사람이 미처 읽어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말했다. 막상스 페르민의 '눈' 같은 소설이 자신에겐 어려웠다고. 그러자 한 사람이 말했다.
"세상에, 저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가슴이 뭉클했는데."
그가 말을 받았다.
"그래도 다 읽고 나서는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어요."
똑같은 책을 서로 다르게, 혹은 발견하지 못한 채 읽는다. 그것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게 독서 모임.
나는 그가 말한 '아름답다'에 생각이 머물렀다. 넥타이 매고 수십 년 출퇴근한 그가 책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구나, 싶었다. 실용적인 책, 그래서 정보서는 읽어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책은 밀려나는 때.
똑똑 일러주는 정보 위주의 책이 아닌, 생각해야 하는 책은 때로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어렵고 불편하기도 하다. 때로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마음은 일궈지고 부드러워진다. 그 부드러움 속으로 떨어지는 씨앗은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자라난다.
입시에서 벗어나면 취업, 그러다 때 되어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남들 휴가 갈 때 휴가 가고, 운 좋게 아파트라도 한 채 장만하거나 평수를 늘려가거나 하다 보면 퇴직. 돌아보면 남들처럼 살기 바빴던 시간이다. 꿈꾸는 삶으로 몸을 틀기 위해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나만의 숨을 쉬고, 내 숨소리를 들으며 살 수 있다. 예순도 넘었는데, 살던 대로 사는 것에서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그것이 책 읽기든 그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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