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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교에 또 당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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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명백히 우리 영토인 독도가 마치 영유권 분쟁이 있는 곳처럼 된 데엔 미국의 책임이 크다. 전범국 일본의 배상과 점령지 독립 문제 등을 다룬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명기돼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도를 일본령으로 한다는 6차 초안이 작성된 데 이어 최종본에서는 아예 독도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누구의 영토도 아닌 것처럼 애매모호하게 처리된 건 일본 외교의 힘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적잖다. 당시 윌리엄 시볼드 주일 미 국무부 정치고문은 독도를 일본령으로 한 뒤 이곳에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주장을 폈다. 러일전쟁 당시 독도에 망루를 설치한 일본의 발상과 일맥상통한다. 한반도가 공산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독도를 한국 땅으로 명시하는 걸 주저했고 일본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들었다. 초안이 바뀐 뒤 독도를 다시 한국령에 포함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을 당시 딘 러스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단호하게 거절한 건 이런 배경이다.
일본이 외교의 중요성에 눈을 뜬 건 1853년 네 척의 검은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벌인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게 계기지만 1871년 미국과 유럽으로 떠난 이와쿠라사절단이 받은 충격이 결정적이었다. 사절단은 귀국 후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매진하는데 당시 부단장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외무성에 조약국을 설치하고 국제법학회를 만드는 등 공을 들인 일본은 러시아와 싸우기 전 영일동맹부터 맺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선 식민지를 나눠 갖는 협상을 할 정도로 외교력을 키웠다. 100여 년 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 때도 대한제국의 외교권부터 박탈했다.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양대 축인 군사력과 외교력 중 전자는 패전으로 무력화됐지만 후자는 유지되며 결국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일본에 유리한 결과를 도출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런 외교 강국 일본이 외교관을 더 늘리겠다고 한다. 현 외무성 직원이 6,600여 명인데 이를 2030년 8,000명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전문 실무 인력 중심으로 1,400명을 더 늘리면 9,000명 안팎인 중국과 나란히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외교관은 “점점 정글로 변해가는 국제 사회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전문성을 갖춘 외교관을 더 키워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국제기구나 국제법을 통한 조율이나 협상도 어려워지면 개별 국가들은 외교력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우리 외교관 수는 2,500여 명 안팎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커진 국력과 경제 규모 등을 감안하면 외교 인력은 오히려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외교가 중요한 나라도 없다. 무역과 에너지의 대외 의존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한다. 유일한 분단국이면서 미중일러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첨예한 이해관계가 늘 충돌한다. 더구나 북한은 핵 위협을 계속하고 있다. 지정학과 지경학적으로 꼬인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데 유럽연합 같은 지역 외교 울타리도 없다. 그럼에도 글로벌 중추국가를 꿈꾼다며 큰소리다.
세상은 또 변하고 있다. 전쟁할 수 있는 정상 국가를 꿈꾸는 일본은 재무장에 외교력까지 강화하며 다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의 위험성보다 더 두려운 건 오염수를 방출하면서도 전 세계적 지지를 끌어낸 일본의 외교력이다. 그런데 우린 여전히 우물 안에서 말싸움만 한창이다. 과연 지금 우린 100여 년 전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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