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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가 말했다..."내가 만든 도시에선 부자와 빈자가 함께 살게 하라"

입력
2023.07.15 04: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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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의 별의별유럽]
⑩ 영국 파운드버리: 영국 국왕 설계 도시

편집자주

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6일 에든버러 남쪽 셀커크의 시장을 방문하면서 시민들과 악수하고 있다. 셀커크=AFP 연합뉴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6일 에든버러 남쪽 셀커크의 시장을 방문하면서 시민들과 악수하고 있다. 셀커크=AFP 연합뉴스

영국엔 '콘월 공국(Duchy of Cornwall)'이라 불리는 땅이 있다. 1337년 에드워드 3세 때부터 '군주의 장남 또는 1순위 왕위 계승자'가 대대손손 물려받는 왕실 사유지다. 면적은 524.49㎢. 세종시(465㎢)보다 크다. 찰스 3세는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 서거로 왕위에 오를 때까지 65년간 1순위 왕위 계승자였다. 콘월 공국을 65년간 소유한 셈이다.

찰스 3세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가장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고 싶다." 왕자에겐 꿈을 현실로 만들 힘이 있었다. 1987년 런던에서 남쪽으로 200㎞쯤 떨어진 콘월 공국 땅 '파운드버리'를 낙점했다. 찰스 3세는 설계를 비롯한 도시 건설의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36년 만에 도시 건설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찰스 3세가 꿈꾼 도시는 어떤 모습인지 찾아가 봤다.

1987년, 찰스 3세의 '꿈'이 현실화하다

파운드버리는 도싯주(州)에 속해 있다. 주도인 도체스터의 인구가 1980년대에 팽창하면서 도시개발 수요가 커졌다. 주정부는 콘월 공국 땅을 활용하는 게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1.6㎢ 크기의 땅, 파운드버리였다.

찰스 3세는 도시개발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현대 도시의 모습을 못마땅해하던 그는 이상적인 도시를 구현해 볼 기회라고 여겼다. 그는 도시 중심에 개발이 집중돼 가난한 자를 외곽으로 밀어내고, 자동차를 사람보다 우선하는 차도를 뚫는 데만 집중하고, 건물은 저마다 과한 개성을 자랑하며 부자연스럽게 솟아 있는 현대 도시를 싫어했다.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그에겐 환경친화적 도시를 실현할 기회이기도 했다.

1993년 당시 왕실 후계자 1순위였던 찰스 3세(오른쪽 두 번째) 영국 국왕이 영국 도싯주의 파운드버리에서 도시개발 관련 첫 번째 현지 미팅을 갖고 있다. 콘월 공국 제공

1993년 당시 왕실 후계자 1순위였던 찰스 3세(오른쪽 두 번째) 영국 국왕이 영국 도싯주의 파운드버리에서 도시개발 관련 첫 번째 현지 미팅을 갖고 있다. 콘월 공국 제공

찰스 3세가 세운 새로운 도시의 원칙은 크게 네 가지다. ①일상 생활의 동선이 짧아야 한다. '사는 곳', '일하는 곳', '쉬고 노는 곳'을 서로 가깝게 둔다는 뜻으로, 한 도시에 중심부가 여러 개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누구도 '주변부'로 밀리지 않게 하고, 자동차 사용을 줄이는 방안이었다. ②보행자들에게 친화적인 도시여야 한다. ③새로 짓는 건축물은 자연, 기존 건축물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④부자와 빈자의 공간이 구분되지 않아야 한다.

1988년 찰스 3세는 독일 출신 유명 도시 계획자이자 건축가인 레온 크리에를 책임자로 지명했다. 크리에는 4단계에 걸쳐 도시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1993년 10월 공사가 시작됐다. 지난 5월 한국일보가 파운드버리를 찾았을 땐 4번째 구역의 건설 작업이 한창이었다.

영국 남쪽 도싯주에 위치한 파운드버리 전경. 도시를 여러 개로 구획(흰 선)해 개발한 것이 특징이다. 도시를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지 않고, 여러 개의 중심부를 두고 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5월 한국일보가 방문했을 땐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콘월 공국 홈페이지 캡처

영국 남쪽 도싯주에 위치한 파운드버리 전경. 도시를 여러 개로 구획(흰 선)해 개발한 것이 특징이다. 도시를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지 않고, 여러 개의 중심부를 두고 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5월 한국일보가 방문했을 땐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콘월 공국 홈페이지 캡처


① 불필요한 동선을 줄여라

파운드버리는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각 구역에는 슈퍼마켓, 식당, 공원 등 상점과 기간시설(인프라)이 큰 쏠림 없이 위치해 있다. A구역에 사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굳이 B구역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현지에서 만난 여행객 클로에·클레어 부부는 "'퀸 마더 광장'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묵었는데 호텔, 슈퍼마켓, 식당, 공원 등을 오가는 데 걸어서 2, 3분이면 충분했다"고 말했다.

인구 4,600명의 소도시인 파운드버리에선 식당에 가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큰 이점이라고 콘월 공국은 설명한다.

새로 들어선 주거용 건물에는 아이들 놀이방과 직장인용 작업실 등이 별도로 구비된 곳이 많다. 도시를 설계할 땐 '원격 근무' 개념이 흔하지 않았지만,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반영했다.

5월 30일 영국 도싯주의 파운드버리 거리 풍경. 운전자보다 보행자를 중심에 두고 설계한 도시이기 때문에 '차량용' 신호등, 표지판 등을 최소화했다. 운전자는 보행자 움직임을 세심하게 살피며 운전해야 한다. 도싯(영국)=신은별 특파원

5월 30일 영국 도싯주의 파운드버리 거리 풍경. 운전자보다 보행자를 중심에 두고 설계한 도시이기 때문에 '차량용' 신호등, 표지판 등을 최소화했다. 운전자는 보행자 움직임을 세심하게 살피며 운전해야 한다. 도싯(영국)=신은별 특파원


② 운전자를 불편하게 하라

파운드버리에서는 차량용 표지판과 신호등 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고 설계했기 때문이다. 제이슨 보워만 콘월 공국 부동산 개발 매니저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호등이 없는 거리에서 운전자는 감히 속도를 낼 수 없다. 운전자는 보행자의 속도와 움직임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자동차들은 속도를 거의 내지 않았고, 보행자 속도에 맞춰 눈치껏 멈췄다.

운전자에게 불편하게 도시를 설계한 건 자동차를 이동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라고 독려하기 위함이다. 일부 건물은 가지런하게 서 있지 않고 삐뚤삐뚤 서 있는데, 이 또한 차량이 직선 코스에서 속력을 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휠체어와 유모차 등을 이용하는 보행자들을 위해 차도와 인도 사이에 경계 턱을 두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③ '원래 있던 것'을 해치지 말라

파운드버리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단정'하다. 가로등, 횡단보도 등도 최소화했다. 거리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힌 표지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의 외양도 통일했다. 건물 외벽은 대체로 연한 갈색이나 베이지색이고, 문과 창틀은 흰색이다. 보워만 매니저는 "찰스 3세가 원한 건 화려하게 멋을 낸 도시가 아니라 잘 어우러지는 도시"라고 말했다.

찰스 3세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데 집중했다. 보워만 매니저는 "새가 머무르고 쉴 수 있도록 건물엔 1개 이상의 '새집'을 설치했다"며 "새 건물이 들어서도 야생동물이 이동 경로를 바꾸지 않을 수 있도록 담장에 동물 이동용 구멍을 뚫었다"고 설명했다. 10대 소녀 3명은 "우리는 환경에 아주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자연친화적인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탄소 감축에도 신경을 썼다. 콘월 공국은 지역 농민과의 합작 투자를 통해 도시 인근에 음식물 등을 분해해 가스를 생산하는 바이오가스 공장을 세웠다. 에너지 사용량이 높은 겨울에도 7,250가구에 공급할 수 있는 양의 가스를 생산한다고 한다(2019년 말 기준).

5월 30일 영국 도싯주의 파운드버리의 공원에서 주민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 도싯(영국)=신은별 특파원

5월 30일 영국 도싯주의 파운드버리의 공원에서 주민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 도싯(영국)=신은별 특파원


④ 부자와 빈자를 가르지 말라

파운드버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어포더블 주택'이다. '감당할 수 있는'이라는 뜻의 '어포더블(Affordable)'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가격이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다. 2026년까지 파운드버리에 들어서는 주택 2,736채 중 약 35%가 어포더블 주택이다.

어포더블 주택이 가능한 원리는 이렇다. '건설 업체는 주택을 25~30%가량 싸게 팔아야 한다. 주택 구매자는 연간 소득 6만 파운드(약 9,954만 원) 미만이어야 한다. 구매자는 나중에 집을 되팔 때 시세 대비 25~30% 싸게 내놓겠다는 데 동의를 해야 한다.'

어포더블 주택은 다른 주택들과 섞여 위치해 있다. 육안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보워만 매니저는 "자산, 소득이 적은 이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 사는 것은 부당하다"며 "어포더블 주택을 다른 건물들과 섞어 배치한 건 빈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언"이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빡빡한 기준" 불만도 있지만…

도시개발 초기엔 "도시개발이 '왕실 인형 놀이'인 줄 아느냐"는 비판도 많았다. 실제로 파운드버리 광장, 거리 등엔 '퀸 마더' 등 왕실 관련 명칭이 붙어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동상도 있다.

'파운드버리 디자인 및 커뮤니티 코드'. 파운드버리에서 거주하거나 사업을 하는 이들이 지켜야 할 규칙 등이 수록된 책자다. 파운드버리에서 생활하려면 해당 책자에 적힌 규칙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콘월 공국 제공

'파운드버리 디자인 및 커뮤니티 코드'. 파운드버리에서 거주하거나 사업을 하는 이들이 지켜야 할 규칙 등이 수록된 책자다. 파운드버리에서 생활하려면 해당 책자에 적힌 규칙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콘월 공국 제공

거주자들이 감수해야 할 불편도 있다. 파운드버리 다머스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팀스(55)는 "차량용 표지판이 없어서 운전자 시야에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곳이나 교차로에서 사고가 날까 늘 우려된다"고 말했다. 건물 유지, 보수, 관리를 할 때도 엄격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부동산 계약 때부터 규정이 빼곡하게 적힌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한 주민은 "문과 창틀은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여야 하고, 시설이 고장나도 교체가 아닌 수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운드버리는 많은 의미가 있다고 보워만 매니저는 설명한다. "차 없는 도시이자 친환경 도시. 지금은 익숙한 개념이지만, 처음엔 다들 '무슨 소리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도전했고, 다른 이들보다 먼저 그 길을 갔다. 다른 도시도 우리처럼 지으라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멈추지 않고 하자는 것이다." 콘월 공국은 제2, 제3의 파운드버리를 구상하고 있다.



도싯(영국)=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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