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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던 시도마저 실패” 비관했던 그에게 일어난 인생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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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죽으려던 11년 전, 삶의 전환점
자신 같은 청년들과 삶의 답을 찾아 나서
“실패의 282들 빛나는 숲 이루는 게 꿈”
‘난 이런 것조차 실패한단 말이야?’
눈 떠보니 욕실이었다. 한동안 기절한 듯했다. 한 달여 전,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실패. 다시 ‘치밀하게’ 준비한 두 번째 시도였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불쌍하고 불쌍했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 커다란 침대에 올라가 몸을 이리 돌려 울고, 저리 돌려서도 울었다. 26㎡(약 8평)짜리 원룸에 틀어박혀 나가지도 않고 지낸 지 이미 5개월쯤 지난 때였다.
얼마나 울었을까.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엄마.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듣자 마자 또 울음이 터졌다. “딸, 왜 그래?” 남원 사투리가 밴 익숙한 음성. 회사를 그만뒀다고, 나가지도 않고 은둔해 지낸 지 벌써 반년이 다 돼간다고, 딸은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딸의 말에 엄마는 말했다. “아이고, 누가 우리 딸을 힘들게 해쓰꼬. 나쁜 사람이네, 아주! 괜찮애, 괜찮애.”
엄마와 통화를 끊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강미선(35) ‘282북스’ 대표의 삶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 이후의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시간을 보내는 청년들이 자신을 마주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자신이 경험한 실패의 시간이 그 토대다. ‘282북스’는 예술 기반 사회적 처방 프로그램을 만드는 예비 사회적 기업이다. 우리 사회 소수자들이 겪은 상처와 실패의 이야기를 예술 작품으로 풀어낸다. 그 과정 자체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어서다. 그들이 만든 예술 작품은 사회를 향한 말하기이기도 하다. 2019년 8월 창업한 이래 청년 자살 시도자, 탈(脫)가정 청년, 암 경험자, 펫로스 증후군을 앓는 이들, 중도입국 청소년, 이주 배경 여성 등과 함께 프로젝트를 해왔다.
“예술 기반 사회적 처방이라는 말엔 제 경험이 모두 녹아 있어요.” 그는 11년 전엔 자신을 두고 ‘자살마저 실패한 삶’이라고 규정했다. 지금은 실패를 직면하고, 그 실패를 삶의 이야기 꾸러미로 만드는 일을 한다.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정말 멋있어.”
그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속살거리는 이파리(282)들의 숲을 꿈꾼다.
-왜 죽으려고 한 건가요.
“이대로 사라져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죽어야지, 살지 말아야지’ 이런 대단한 결심을 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가더라고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학에서 공연 기획을 전공했어요. 공연을 정말 좋아했죠. 졸업하고 대학로에서 일했는데, 현실은 내 생각과 너무 다르더라고요.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일하는데, 돈을 벌지 못했어요. 공연판의 선배들이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아득하더라고요. 1년 정도 일하다가 그만두고 인터넷 동영상 콘텐츠 서비스 업체에 들어갔어요. 당시 주목받던 회사였는데 운이 좋게도 합격했죠. 1년 반 동안 웹서비스 기획 업무를 했는데 이번엔 재미도, 보람도 없는 거예요.”
-꿈을 좇았더니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고, 현실을 따랐더니 이상이 충족되지 않은 거군요.
“그러니 삶의 고민에 직면한 거예요.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었죠. 답을 못 찾았어요. 그 상태로 회사를 다니기도 괴로워서 결국 그만뒀죠. 그러곤 마지막 월급을 어린이 구호 단체에 기부했어요. 그나마 좀 뿌듯하더라고요.”
-기부로 내가 번 돈의 가치를 확인받아야 할 정도로 보람이 없었나요.
“그랬어요. 월급의 의미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기부를 한 건데 그걸로도 채워지지 않았죠.”
-그 뒤로 어떻게 했나요.
“대책 없이 퇴사하고는 집 밖으로 안 나갔어요. ‘나가지 말아야지’라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시간이 지나 보니 집에서만 지내고 있더라고요. 세상과 그렇게 단절된 거죠.”
-그러다가 목숨을 끊을 시도까지 한 건가요.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 뭐 하나. 사라지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내가 ‘잉여(인간)’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시도했는데 안 됐어요. 그러고 나니 좌절감이 더 깊어지더라고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이 된 건가’ 싶어서.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또 시도했는데 이번에도 실패한 거예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며칠 동안 울기만 했죠.”
그때 엄마와 통화를 한 뒤 정신이 번쩍 든 거다. ‘내가 엄마한테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네. 나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서다.
-그 뒤로 어떻게 했나요.
“일단 돈이 없으니까 돈을 만들자 싶었죠. 둘러보니 집에 책이 많더라고요. 중고서점에 팔려고 정리하면서 들추다가 계속 책을 읽게 됐죠. 다 제가 좋아한 책들이니까. 그러다가 쓰기 시작했어요. 문학적인 글쓰기라기보다는 배설에 가까운 글이었죠. 옆집에서 들리는 예초기 소리가 지겹다고도 쓰고, 잔소리 많던 동네 할머니가 싫다고도 쓰고요. 책 보고 글을 쓰면서 몇 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어요.”
-왜 책과 글이었나요.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해보니, 거창한 목표가 필요 없더라고요. 먼 미래 말고 눈 떴을 때 당장 오늘 하고 싶은 걸 하기로 마음먹었죠. 그때는 그게 책 읽고 글 쓰는 거였어요.”
-그렇게 사니 어땠나요.
“마음이 서서히 나아지더라고요. 어릴 때 책 읽기, 글쓰기를 참 좋아했거든요. ‘산책도 나가볼까’ 싶은 마음도 들고요. 문고리조차 잡지 못했는데 말이죠.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서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됐어요.”
-어떤 친구요.
“보험 영업을 하는 친구였는데, 한두 번 대충 핑계를 대면서 미뤘는데 꾸준하게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 친구를 만난 게 거의 1년 만에 제대로 한 외출이었죠. 저를 보더니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머리칼이 왜 이렇게 됐냐고요.”
친구 말에 미용실 거울 앞에 앉는 순간, 아주 낯선 자신과 마주했다. 머리칼은 조선시대에서 건너온 듯 허리 근처까지 길었다. 몸집도 엄청 불어 있었다. 12㎏이나 쪘다는 걸 그때 알았다. 마음이 우울하면 안 먹거나 폭식을 한다는데, 그는 후자였다. 밑 빠진 독처럼 허기가 졌던 거다. 자존감의 결핍이 음식으로 채워질 리가. 세상과 단절돼 있는 동안 그런 악순환이 반복됐다. 머리칼을 자른 뒤 집에 돌아가자 그제서야 보였다. 쓰레기장 같은 집안이. 전등도 켜지 않고 살았기에 그간엔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의 불이 켜지자 주변도 눈에 들어오게 된 거다.
-그때 느낀 건 뭔가요.
“나를 놔버리는 게 제일 위험하다는 거요. 내가 나를 보지 않으니 남하고도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거죠.”
서서히 행동반경이 넓어졌다. 책을 빌리러 다닌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됐다. 봉사활동을 하면서다. 도서관에서 그에게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청소년과 글쓰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처음부터 잘되진 않았다. 열댓 명과 시작했는데, 마지막까지 함께한 아이는 세 명 정도였다. 나쁘지 않았다. 그 덕에 더 깊게 얘기를 나누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아이들은 글에 지금의 마음을 담았다.
-학생들의 글이 어땠나요.
“정제돼 있지 않아 거칠고 날카로웠지만 마음에 와닿는 글이었어요. 혼자 보기 아깝더라고요.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포스트잇’에 써서 거리에 붙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처음엔 거부하더라고요. 이 글이 같은 처지의 친구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다고 설득했죠. 물론 이름 같은 신원은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고요.”
그는 학생들의 글을 가해 학생이 다니는 학교 근처 담벼락이나 전봇대에 테이프를 활용해 붙였다. 오가다 떨어진 걸 보면 다시 붙여두기도 했다. 일주일쯤 지났는데 낯선 학생이 찾아왔다.
-누구였나요.
“제가 오가면서 포스트잇을 붙이는 걸 보고 찾아온 학생이었어요. 포스트잇에 적힌 (따돌림 가해) 글이 자기 이야기 같다면서. 알고 보니 한 학생을 중학교 시절 따돌림으로 가해했던 학생이었어요. 자기가 피해를 준 친구를 만나고 싶어했어요. 조심스럽게 그 글을 쓴 학생에게 물어보니 만나겠다고 하더라고요. 혹시나 돌발 상황이 생길까 봐 관장님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죠. 오후 4시 반쯤부터 저녁 식사 즈음까지 둘이서 두 시간 넘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가해 학생이 말했다. “나는 아직도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 미안해.” 피해를 당했던 학생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눈치였다.
-그 뒤로 변화가 있던가요.
“그 친구가 쓰는 글의 분위기가 달라졌죠. 전에는 자기를 비하하는 내용을 쓰거나 소설을 써도 아주 폭력적인 내용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후부터는 재미있는 글도 쓰고 농담도 넣더라고요. 글쓰기가 치유에 도움이 되는구나 생각했죠.”
-그때 많은 걸 느꼈겠어요.
“글쓰기로 속마음을 풀어내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만의 집에 갇혀서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방법을 찾아주는 일을 하고 싶어졌죠. 저도 우울증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병행했지만, 글쓰기가 지닌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요. 도서관 활동으로 끊어졌던 사회적 관계를 다시 맺기 시작하면서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회사 다닐 땐 쓰임을 다하면 버려질 존재라고 느꼈거든요.”
그는 ‘오늘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5년 동안 문화 관련 비영리법인, 사회적 기업, 비정부기구(NGO) 등에서 일했다. 창업을 하게 된 계기는 뎅기열이었다. 당시 다녔던 NGO에서 첫 해외 현장 활동 파견을 갔다가 뎅기열에 걸린 거다. 뎅기열은 아직 백신이나 항바이러스제가 없다. 대증요법으로 치료하는 게 최선이다.
-왜 뎅기열 감염이 계기가 됐나요.
“감염내과 병동 다인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공교롭게도 다른 환자의 죽음을 여러 번 봤어요. 그때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됐죠. 미루지 말고 하고 싶은 건 바로 하자고 결심했어요.”
2019년 8월, 그는 282북스를 만들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해본 경험이 창업하는 데 도움이 됐다.
-282북스를 설명하는 문구가 ‘예술 기반 사회적 처방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예요. 처방의 핵심을 스토리라고 본 건가요.
“제 경험이 다 녹아 있는 단어들이죠. 이야기가 가진 힘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 하나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요.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도울 뿐이죠.”
그래서 282북스가 운영하는 모든 프로그램은 글쓰기에서 시작한다.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한 뒤 그걸 바탕으로 그림, 사진, 춤 같은 다양한 예술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암 경험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인 ‘암어모델 I AM A MODEL’은 패션쇼로 대미를 장식했다. 이들의 사진으로 화보 달력도 만들었다. 암으로 멈췄던 삶의 걸음을 다시 걷는 이들을 응원하고, 사회의 편견도 완화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결국은 치유에 이르는 게 목적인 거지요.
“예술의 기능 중에 치유가 있잖아요. 예술 작품을 보는 것으로 치유를 얻기도 하지만 창작하면서 치유되기도 하거든요. 예술을 매개로 한 선순환이죠.”
-글쓰기가 기본이라고 했는데, 참여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자기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면 객관화가 되거든요.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건 다르죠. 거기서 시작돼요. 일단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하니까. 내가 겪었던 혼란의 시간도 그것 때문이었죠.”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뭔가요.
“정말 하고 싶어서 오래 묵혀뒀다 한 프로젝트가 있어요.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자살 시도자를 위한 프로그램이에요. ‘메리골드의 꽃말을 아나요?’란 제목이죠. 정말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제가 경험자이기도 하지만, 대학 때 자살한 친구에게 지닌 마음의 빚 때문이기도 했어요. 그 친구가 보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죠.”
-왜 프로젝트 이름을 ‘메리골드의 꽃말을 아나요?’라고 지었나요.
“처음 생각한 이름은 ‘내 꿈은 자연사’였어요. 그런데 동명의 책이 있더라고요. 고민하던 중에 메리골드의 꽃말을 알게 됐어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거든요. 의미가 좋더라고요. 꽃씨를 사다가 화분에 심고 볕이 잘 드는 곳에 뒀어요. 물도 열심히 줬죠. 며칠 뒤 줄기가 올라오는데 무순처럼 너무 약한 거예요. 그렇잖아도 걱정스러웠는데 어느 날 툭 쓰러지더라고요. 그래도 버리지 않고 줄기를 더 깊이 잘 심어봤어요. 그러곤 창가에 두고 일이 바빠서 잘 보살피질 못했죠. 물도 생각날 때만 한 번씩 주고요. 그런데 이번엔 줄기가 엄청 굵어지더니 건강하게 잘 자라는 거예요.”
-왜 그런 거죠.
“생각해보니 바람 때문이었어요. 처음엔 애지중지하면서 창문도 잘 열지 않았거든요. 다시 깊이 심고 나선 창을 열든 닫든 신경 쓰지 않았거든요. 이른바 ‘빌딩풍’이 거센 곳이었는데 그걸 이겨내려고 뿌리도 더 깊이 내리고 줄기도 굵어진 것 아닌가 해요. 이 프로젝트의 취지가 생각났죠. 죽으려고까지 마음먹었던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비바람이며, 그걸 견뎌 오늘을 맞게 된 것이란 의미를 담아 메리골드를 넣어서 이름을 지었죠. ‘당신은 더 강해져서 당신만의 꽃을 피울 것이다. 또다시 비바람에 쓰러져도 더 굵어진 줄기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살 시도자들은 어떻게 모았나요.
“서울시 청년 프로젝트 사업으로 선정되면서 하게 됐어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포스터로 참여자를 모았고요. 홍보 콘텐츠 중에 제가 자살 시도 경험을 얘기하면서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하는 영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많이 지원했더라고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만든 프로젝트라는 신뢰감을 줄 수 있었겠네요. 얼마나 신청했나요.
“60명 정도 지원했는데 그중 12명을 선정했어요. 한 명씩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으로 인터뷰를 한 뒤에 정했죠.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 위주로 추렸어요. 예를 들어, 춤을 추거나 연기를 하는 사람은 그래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도구가 있으니까요.”
8주간의 프로그램은 이랬다. 글쓰기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한 뒤, 배우와 함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한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세분화해 적어보는 ‘감정 이름장’도 만들어 본다. 프로그램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오브제를 하나씩 선정해 함께 사진을 찍고 그것으로 전시도 열었다. 그들의 사진과 글은 단행본 ‘메리골드의 꽃말을 아나요?’로 출간됐다.
-참가자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후기 중에 ‘너무 좋았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그 말이 제일 좋더라고요. 무엇보다 참가자 12명 중 이탈자가 없었어요. 워크숍은 8주간 했지만, 이후 사진을 찍고 전시한 기간까지 따지면 5, 6개월 동안 이어진 프로그램이거든요. 그런데 중도 하차한 사람 없이 전원이 끝까지 함께한 게 이 프로젝트의 효과를 증명한 것 아닌가 싶어요.”
-변화도 느껴졌나요.
“예를 들어, 초등학교 때부터 아동 우울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은 참가자가 있었어요. 중학교 때 자퇴해서 친구도 없고요.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또래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 거죠. 그렇게 고립돼 지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친구들을 만나 달라진 거죠. 말도 많아지고, 감정 표현도 하고요.”
-그 프로젝트가 본인에게도 참 의미 깊었겠네요.
“마치고 나서 엄청 울었어요. ‘정말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앞으로도 2차, 3차 계속 하고 싶어요. 그만큼 필요한 프로젝트예요. 자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재시도했을 때 성공 확률이 더 높아지거든요. 그런데 대개 사회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위로하고 동정하면서 자살 시도를 했던 사람들에게는 ‘나약하다’면서 손가락질하죠. 그러니까 자살 시도자들은 입을 닫게 돼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정서적 자살 시도를 계속 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런 힘겨운 상태를 견디고 있다는 걸 그들이 만든 콘텐츠가 보여주죠. 그 콘텐츠는 우리 사회가 자살 시도자들에게 갖는 부정적 시선이나 편견을 버리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 소통의 도구이기도 해요.”
-실패한 프로젝트는 없나요.
“실패라면 실패한 건데요. (웃음) ‘플레이더월드’라는 프로젝트예요. 청년 사회 혁신가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죠. 사회적 기업을 하는 청년을 모아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가치를 소리로 치환해 합주로 만들어보자는 취지였어요. 그런데 워낙 바쁜 사람들이라는 게 문제였어요. 10명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엔 4명만이 남게 됐죠.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어요. (웃음) 4명이 밴드를 했고 영상 콘텐츠를 만들었죠.”
-282북스는 결국 우리 사회가 실패자로 낙인찍는 이들의 경험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창업 초기엔 참여자들의 변화를 보면서 신이 났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어 버겁기도 했죠. 그래서 우리 회사를 소개할 때 ‘없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회사’라고 설명해요.”
-운영은 어떻게 하나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사회복지기관, 기업들의 지원사업에 응모해 프로그램 운영비를 지원받아요. 그렇기에 참가자들은 무료로 참여할 수 있죠. 282북스의 프로그램을 다른 단체나 기업에 최적화해서 팔기도 하고요. 상근 직원은 저와 디자이너가 있고 프로젝트마다 함께할 팀을 새로이 짜서 운영하죠. 프로젝트가 끝나면 콘텐츠를 판매해 수익을 얻기도 하고요. 그래도 운영자금이 부족한 게 가장 힘들죠.”
-282북스의 목표는 뭔가요.
“우리 사회 소수그룹에는 말하는 방법을 찾게 하고, 공동체엔 소수그룹의 이야기를 듣는 힘을 기르게 하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우리 같은 회사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지는 사회를 꿈꾸죠. (미소)”
그를 만난 곳은 282북스가 올해 3월 만든 ‘282살롱 선유도 사유의 공간’이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다. 282북스가 제안하는 주제를 두고 생각하고 다양한 콘텐츠로 이를 정리해볼 수 있는 곳이다. 사유의 길라잡이가 되는 책, 그림, 영상, 음악이 곳곳에 있다. 282북스가 운영하는 멤버십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되고, 장소를 대여해 쓸 수도 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공동체가 과연 이걸 들어줄 수 있을까’ 하는. 타인의 말을 듣는 힘도 길러야 사회가 건강하게 순환되지 않겠나 싶어 만든 공간이죠.”
-생각보다 꿈이 크네요. (웃음)
“엄청 커요! 하하. 뭐든 못 하겠습니까. 저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무슨 뜻인가요.
“내 기준으로 끝을 봤으니까요. 내가 갈 수 있는 끝에 가봤으니까요. 나와의 관계마저 끊으려고 했던 사람이잖아요. 지금의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나를 보내줄 때는, 나를 아주 사랑하는 상태에서 아름답게 이별하고 싶어요.”
-인생의 모든 게 다 실패로 느껴지던 시기를 지나 여기까지 왔네요. 그런 강미선만의 언어로 ‘실패’를 새로이 정의해본다면 뭘까요.
“실타래를 실패라고도 하잖아요. 실패와 실패(失敗)가 동음이라는 데 착안해서 실패를 실패들의 묶음이라고 생각해봤어요. 그 실패의 경험을 한 올씩 풀어내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제가 그랬잖아요. 자살 시도가 또 다른 시작이 돼서 이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실패의 경험들이 준 삶의 도는 무엇인가요.
“내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진 생각요! ‘오늘 하고 싶은 건 오늘 하자.’ 이 회사도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둘지도 모르죠.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고 있어요. 너무 먼 미래의 무언가를 꿈꾸면 지치고, 옛날 일을 생각하면 힘든 것만 떠오를 것 같거든요. 지금 저는 282북스를 운영하면서 제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282북스의 282는 이파리를 표현한 숫자다. 발음이 같은 데서 따온 것이다. 숲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이파리, 그 이파리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가 말했다. “작은 이파리들이 모여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잖아요. 우리가 만든 이야기 숲에서 말하고 듣고, 또 자기만의 방식으로 쉬고 즐기다 가세요!”
이파리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할 차례다.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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