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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명 목숨 앗아간 '여객기 대학살'... 시칠리아섬 앞 바다 밑에 가라앉은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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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43년 전 이탈리아 볼로냐의 굴리엘모 마르코니 공항. 시칠리아섬의 도시 팔레르모까지 비행 예정 시간은 고작 1시간 30분이었다. 그날따라 2시간가량 연착이 발생한 것 외에는,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비행이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남들보다 조금 빨리 팔레르모 해변을 찾는다는 생각에 들뜬 승객들을 태운 '이타비아(Itavia)항공 DC-9-15 여객기 870편'은 1980년 6월 27일 오후 8시 8분, 그렇게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륙 30분 뒤 기장인 도메니코 가티(34)는 관제소에 "여객기가 이탈리아 본토를 통과해 티레니아해(海)를 지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비행은 계속됐다. 목적지인 팔레르모 도착까지 불과 30분 정도를 남긴 오후 8시 59분, 이타비아 870편은 티레니아해 작은 섬 우스티카 상공에서 굉음과 함께 폭발한 뒤 추락했다.
민간 레이더망에 마지막 위치(고도 2만5,000피트·우스티카 북쪽 80㎞ 지점)가 잡힌 이후 교신은 끊겼다. '승객 77명, 승무원 4명 전원 사망.' 오늘날 '우스티카 대학살(The Ustica massacre)'로 알려진 참극의 시작과 끝은 이랬다.
탑승자 81명 가운데 생존자는 없었다. 성인 승객 64명, 어린이(2~12세) 11명, 24개월 미만 유아 2명, 기장을 포함한 승무원 4명이 모두 사망했다. 이타비아 870편이 우스티카로 추락한 직후, 토스카나 그로세토 공군 기지에서 제트기 F-104가 현장으로 출동했지만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일부 승객의 시신이 해역에서 발견된 건 이튿날 아침이었다.
수색 작업은 한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수심 3,500m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그것도 산산조각 난 기체를 발견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잔해는 수십 만㎢ 면적에 달하는 해협을 떠다니고 있었다. 구조 당국은 결국 기체 일부와 승객 38명의 시신만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즉시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참사 초기 정부와 전문가 집단은 기체 내부에 폭발물이 설치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10여 년에 걸쳐 바다에서 기체 일부와 잔해를 건져 올렸고, 이를 토대로 1994년 "내부 폭발물로 인한 사고"라는 잠정 결론을 내린 보고서도 발표했다. 인양된 기체를 조사해 보니, 기내 뒤편 화장실 부근에 유독 심각한 손상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타비아 870편 참사가 발생한 지 일주일 만인 1980년 8월 2일, 볼로냐 첸트랄레 기차역 대합실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도 '기내 폭발물 설치' 주장을 뒷받침했다. 당시 기차역 폭발로 85명이 사망했고 200명 이상이 다쳤다.
동시에 '미사일 격추설'도 고개를 들었다. 항공기 창문 조각과 기체 부속품 일부가 기내 좌석 쿠션에서 발견된 점, 일부 승객의 시신에서 항공기 외장 보호용으로 사용된 파편 일부가 확인된 점 등이 근거로 활용됐다. 항공기 외부에서 폭발이 발생해 파편들이 내부로 밀려들어왔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내부 폭발설'과 '외부 격추설' 중 어느 쪽도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진 못했다. 폭발 전후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영상도, 사고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목격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만 속절없이 흘렀고, 사고 원인을 둘러싼 각종 가설만 난무했다.
1999년 또 하나의 추측이 이탈리아를 뒤흔들었다. 이타비아 870편은 리비아 정권을 겨냥해 서방 국가들이 펼친 군사작전의 희생양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리비아를 철권통치하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축출하기 위한 군사 작전에 나섰다. 참사 당일에도 사고 해역 부근에서 나토 전투기와 리비아 전투기 간 공중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타비아 870편이 덩달아 미사일에 격추됐을 것이라는 추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토가 공개한 사고 당일 레이더 모니터링 기록에 따르면, 이타비아 870편이 티레니아 해역으로 진입했을 무렵, 인근에는 리비아 미그(MIG-23) 전투기를 비롯해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전투기가 같은 상공을 날고 있었다고 한다. 참사 발생 약 3주 후인 1980년 7월 18일, 팔레르모에서 약 320㎞ 떨어진 칼라브리아 산맥에서 리비아 미그 전투기 잔해와 조종사 시신이 발견된 점도 이런 주장에 힘을 실었다.
테러 사건 전문가로 유명한 로사리오 프리오레 치안판사(한국의 검사 역할)는 당시 독일·영국의 항공 전문가들과 이런 내용의 조사 결과를 담은 5,488쪽짜리 보고서를 냈다. 그는 "이타비아 870편은 리비아를 둘러싼 군사 전쟁에 휘말려 희생됐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나토와 이탈리아 공군이 조사에 협조하긴커녕, 당시 공중전이 있었던 사실 자체를 은폐하려 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후 이탈리아 사법 당국은 여기에 연루된 공군 장성들을 대반역죄와 위증죄 등으로 기소했다. 그러나 수년에 걸친 재판 끝에 이들은 공소시효 만료와 증거불충분 등으로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81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타비아 870편 참사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우스티카 대학살'의 여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뒤흔든 참사가 발생한 지 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날의 진실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뒤늦게나마 한 조각의 사실이라도 더 밝혀내려는 노력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유족들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
2007년 6월 27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문을 연 '우스티카 추모 박물관'이 대표적이다. '우스티카 대학살 희생자 유족 협의회'를 꾸려 진실 규명을 요구했던 유족들이 주축이 되고, 볼로냐시 당국과 법무부 등이 힘을 보태 참사 27년 만에 세운 곳이다. 이곳에는 추락 당시의 처참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 이타비아 여객기 동체 일부와 그 잔해가 전시돼 있다. 추락 현장에서 발견된 승객들의 유품 수십 점도 함께 보관돼 있다.
2011년 9월 이탈리아 법원은 희생자 81명의 유족에게 정부가 1억 유로(현재 환율 기준 약 1,400억 원)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정부가 여객기 안전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던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당시 유족 측 변호인을 맡았던 다니엘레 오스나토는 법원 판단에 대해 "정의가 실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탈리아 정부는 "받아들이기 힘든 판결"이라며 항소했다.
2013년 1월엔 이탈리아 최고항소법원이 이타비아 여객기 폭발에 대해 "미사일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풍부하고 모순되지 않은' 증거들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얻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폭발 원인이 무엇이든, 정부가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원심은 확정됐다. 다만 미사일을 쏜 주체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이타비아 870편 참사 43주기였던 지난달 27일, 이 사고로 오빠를 잃은 다리아 본피에티 유족협의회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민항기가 격추됐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그날 밤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국가들에도 물어야 합니다. 마지막 진실을 찾기 위한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무려 43년 동안 되풀이해 온,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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