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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빠른 기술 추격은 ①이공계 존중 ②과학을 아는 정치인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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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기술이 한국을 맹추격 중입니다. 중국 반도체 수준은 어디까지 올라왔고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까요? 미국과의 반도체 전쟁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한국일보가 상세히 짚어봤습니다.
중국의 목표는 삼성전자와 미국을 이기는 게 아닙니다. 중국 정부의 반도체산업 육성 정책은 선단공정(미래를 대비한 선행기술)이 아닌 국산화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결국 반도체 굴기는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우근 칭화대 집적회로학원 교수
지난달 30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이우근 칭화대 집적회로학원(반도체대학원) 교수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 성공한 것인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뒤 IBM 왓슨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2006년부터 중국 최고의 이공계 인재들이 모인 칭화대에서 종신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한·미·중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몇 안 되는 전문가다. 미국이 반도체에서 칩4 동맹(한·미·일·대만)을 추진하고,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현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석학이다.
그런 그가 중국의 반도체 산업의 성장이 "무섭다"는 진단을 내렸다. 근거가 뭘까. 이 교수는 "한국은 D램과 낸드플래시의 기술 격차를 이야기하며 여전히 중국 반도체 산업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며 "반도체 분야엔 역사가 60년 정도된 국제고체회로학회(ISSSC)가 있는데, 여기에서 올해 처음 중국 논문 수가 미국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고 소개했다.
기초에서부터 경쟁력을 쌓아간다는 것이 중국 기술의 무서운 점이라고 할 수 있죠.
이우근 칭화대 집적회로학원 교수
우선 이 교수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기술 격차가 아닌, 산업의 자생력을 살펴야 한다고 전제했다. 미국의 제재로 중국의 최첨단 공정은 타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기초를 단단히 하며 자체 생태계를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는 얘기다. '2025년 국산화율 70% 달성'이라는 명시적 목표는 실패하겠지만, 과거 60% 이상을 수입에 의존했던 반도체 제조 국산화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다.
이 교수가 중국의 시도를 '성공'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이렇다. 그는 "반도체 산업은 시행착오가 반드시 필요해요. 그런데 중국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제재 이후 국가의 천문학적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죠. 또 중국 정부는 무선키보드, 마우스 등에 들어가는 레거시(성숙) 공정에서는 이미 국산화가 진행되면서 중저가 반도체 쪽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동안 부족하다고 지적돼 온 장비, 전자설계자동화(EDA)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면서 생태계 전반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국 반도체산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과학에 대한 존중 △이공계 출신 정치인들의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중국은 1950년대부터 이공계를 경시하던 전통과 철저히 결별하기 위해 중리경문(重理輕文), 즉 이과를 문과보다 중시하는 교육 정책을 펼쳐왔다. 이 때문에 장쩌민(상하이교통대 전기학), 후진타오(칭화대 수리공학), 시진핑(칭화대 화공) 등 최근 최고지도자들은 모두 공대 출신이다. 법조인 출신이 많은 한국 정치권과 다른 점이다.
이 교수는 칭화대가 이공계 인재에게 가진 존경심을 보여 준 한 사례를 소개했다. "칭화대에서 총장 주재로 과학원로들을 초대해 회의를 가진 적이 있었어요. 총장과 당서기가 두 시간 넘는 회의 동안 단 한 번도 등을 의자에 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과학원로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더군요. 중국 정부의 각 부처 공무원들도 기술에 대한 이해가 높습니다. 알고 보니 실무직 공무원들도 따로 시간을 내서 과학기술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중국에선 국가경제의 70%가 과학 발전에 달려 있다는 전반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며 "한국도 국회의원의 최소 20%가 이공계 출신이었다면 정책에서 현장의 목소리가 더 반영될 수 있었을 것"라며 아쉬워했다.
중국에서 최상위권 학생들이 반도체학과로 몰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교수는 "실제로 반도체 국산화 등의 사명이나 애국심을 갖고 반도체를 연구하는 학생들이 많다"며 "6, 7년 전 화웨이 등 중국 기업들이 연봉을 미국 테크기업 수준으로 올리면서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도 중국에 남으려는 학생들이 오히려 더 많아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엔 졸업 후 전자과 공무원이나 재무 관련 직종을 지망하는 석사생들이 많았는데, 최근엔 회로 디자인 자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것도 눈에 띄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 교수는 미·중 갈등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만큼, 한국이 급변 상황을 대비한 '플랜B'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미·중 갈등 상황에서 한국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가 갑자기 미·중 관계가 해빙무드로 전환되면, 꼼짝없이 '낙동갈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사실 미국이 마음먹고 완전히 나서면 중국 반도체를 말려죽일 수 있다"며 "미국 정부가 화웨이, 중신궈지(SMIC) 등 주요 기업 몇몇만 제재하는 이유는 미국 입장에서도 중국 시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술 격차를 일정 수준 유지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특히 내년에는 미국 대선이 있어 향후 2, 3년간 미·중 관계를 손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 교수는 "갑자기 갈등이 완화되면서 중국이 갑자기 마이크론 제재를 철회하고 미국 제품을 적극적으로 수입하겠다고 하면 국내 기업들은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중국에서 한국 기업들이 구축한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선 갈등 속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무조건적인 중국 엑시트(출구) 전략이 아닌, 포기할 것은 포기하면서도 현지 투자가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국내 행사나 포럼 등에 가보면 중국과 '헤어질 결심' 혹은 '선택의 시간' 등을 언급하는 정부 관계자들이 있는데, 반도체 산업은 단순 기술력이 아닌 외교력과 정치력의 싸움인 만큼 감정적으로 접근해선 안된다"며 "전략적 차원에서 백업플랜을 마련하고 이공계 및 중국 현지 전문가들의 의견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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