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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이 길을 잃으면 구조대가 출동"...이 도시는 '도심 양봉'에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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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꿀벌 대량 실종" "꿀벌 멸종 위기"…. 뉴스 제목을 자주 장식하는 문구다.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꿀벌 군집 붕괴 현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꿀벌 실종 현상이 보고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9~11월 약 100억 마리가 사라졌다.
'꿀벌의 위기'는 '인간의 위기'다. 꿀벌은 가장 중요한 화분매개자다. 꿀벌 같은 화분매개자가 꽃가루를 옮겨야만 번식이 가능한 농작물이 상당하다. 국내에서 화분매개자에 의존하는 농산물 생산량은 연간 270만 톤, 전체의 17.8%에 달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식량 부족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미국 하버드대에선 "화분매개자 감소로 매년 약 40만 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한다"는 연구 결과도 내놨다.
이런 상황에서 몸값이 '급상승'한 도시가 있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다.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이곳은 사실 양봉에 불리하다. 그러나 양봉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도심 양봉'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유엔이 제정한 '세계 벌의 날'(5월 20일)을 계기로 '꿀벌 정책 모범 도시' 류블랴나를 들여다봤다.
류블랴나의 '양봉 사랑'은 슬로베니아 전통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나라는 어떤 나라보다도 양봉에 진심이었다. 예컨대 벌통을 블록처럼 쌓아서 꿀벌을 키우는, 현대 양봉의 선구자는 슬로베니아 출신 얀톤 얀사(1734~1773년)다. "얀사의 생일인 5월 20일을 '세계 벌의 날'로 지정하자"고 유엔에 건의해 해당 기념일을 만든 국가도 슬로베니아다. 이곳의 양봉 인구 비율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200명당 한 명이 양봉을 한다.
꿀벌에 대한 애정이야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지만, 류블랴나 도심은 처지가 달랐다.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도시화한 탓에,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도심 한복판에서 '벌을 키우겠다'고 상상하는 건 쉽지 않았다. 꿀벌은 필수 영양분을 제공하는 밀원식물이 반경 3㎞ 내에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이랬던 류블랴나를 '도심 양봉 선도자'로 탈바꿈시킨 건 우연한 계기였다. 2003년 어느 날, 류블랴나 중심부 '칸카르예브 돔' 직원 프란츠 페트로우치치는 "프랑스 파리의 한 오페라 공연장 옥상에서 양봉을 한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칸카르예브 돔(이하 돔) 역시 의회 회의장 겸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우리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내 단념했다. '누가 벌을 관리하나' '사람이 벌에 쏘이면 어떡하나' 등 여러 고민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돔은 국민들은 물론, 외빈 방문이 워낙 잦은 곳이라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큰 논란을 부를 게 뻔했다. 더구나 아마추어인 자신이 '개인적 의지'만으로 양봉을 시작했다가 꿀벌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까 겁도 났다. 그래도 그냥 포기하긴 싫었다. 일단 교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먼저 양봉을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8년 뒤인 2011년, 페트로우치치는 '도심 양봉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꿀벌을 직접 키워 본 결과, 관리가 까다롭지 않았다. 온순한 성격을 지녔다는 판단도 들었다. 돔 인근에 대형 공원이 있으니 꿀벌이 먹이를 얻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봤다. 그는 '꿀벌 세 가족'을 돔 옥상으로 데려갔다. 통상 한 상자를 '한 가족'으로 표현하는데, 상자당 2만 마리 정도가 살고 있으니 총 6만 마리에 해당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페트로우치치는 "그해 얻은 꿀이 60㎏ 정도"라고 회상했다. 성공 소식이 전해지자 우려도 나왔다. '차량 통행 등으로 공기 오염이 심한 도심에서 꿀벌을 키우는 게 적합한가' '그런 꿀벌이 만든 꿀이 안전하겠느냐'는 의구심이 쏟아졌다. 그는 "도심 양봉을 본격화하려면 그런 의문들을 먼저 해소해야 했다"고 말했다.
안전성 검증을 위해 페트로우치치는 돔에서 채취한 꿀을 독일 품질 보증 기관에 보냈다. '뜻밖의 결과'를 얻었다. 그는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소도시에서 생산된 꿀보다 더 깨끗하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농촌에선 살충제 사용이 많아 꿀벌에 위험한데, 오히려 도심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도심 양봉이 탄력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됐다.
이 정도로 그쳤다면, 페트로우치치는 '도심 건물 옥상에서 꿀벌 키우기에 성공한 사나이'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류블랴나시가 '확실한 지원'을 약속하며 판이 커졌다. 시 환경보호부에 근무하는 꿀벌 정책 담당자 마르슈카 마르코프치치는 "도심 양봉은 개체수 유지뿐만 아니라 꿀벌의 중요성을 전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시는 도심 양봉가를 새로 모집했다. 도심 양봉을 마음먹은 사람들에겐 장비 구입 비용 등을 지원하고, 양봉 지식이 없는 이들에겐 교육을 제공했다. 양봉가협회, 대학, 연구기관 등이 관련 정보를 원활하게 공유할 수 있도록 중간자 역할을 자처했다.
무엇보다 '꿀벌친화적' 환경 만들기에 주력했다. 꿀벌이 먹이를 찾아 오랜 시간 헤매지 않도록 식량인 밀원식물을 도로나 건물 주변 등 곳곳에 심었다. 풀밭에 떨어진 꽃씨 등의 훼손을 최소화하고자 잔디도 최대한 천천히 깎았다. 마르코프치치는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며 '게으르다'고 비판하는 시민도 많았지만, '꿀벌을 살리는 게 우리가 사는 길'이라고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대기오염 최소화를 위해 차량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대표 사업 중 하나는 '꿀벌 긴급 구조 프로젝트'다. 시는 '길 잃은 꿀벌 떼를 발견하면 112로 신고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신고가 접수되면, 당직 양봉가가 협업해 꿀벌을 구한다. 2년 전부터는 꿀벌의 질병 감염을 막기 위한 의료 지원 사업도 새로 시작했다.
특히 중점을 두는 건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다. 마르코프치치는 "미래 세대가 '꿀벌과의 공존'을 중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만, 도심 양봉을 비롯한 꿀벌 사업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교 옥상 위에 벌집을 설치한 사례가 많고, 교내에선 양봉 동아리 활동도 권장된다.
'도심 양봉 투어'도 진행한다. 시가 의뢰해 현지 가이드 미로 그라차닌이 지난달 19일 진행한 꿀벌 가이드에 참여했더니, 많은 어린이들이 보였다. 그라차닌은 돔 옥상 등 구석구석을 돌며 꿀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지원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3시간가량 이어진 투어에도 지친 기색 없이 "벌들이 쏘진 않나요" 등 질문을 하며 집중했다. 다음 날 시청 앞에서 열린 '세계 벌의 날' 기념행사에선 꿀벌 관련 각종 워크숍도 열렸다.
홍보에도 열심이다. 2년 전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들엔 벌집을 만들었다. 관광 명소로 벌집을 활용하는 것이다. 도심에서 나는 꿀은 외빈용 선물로 제작된다.
이러한 노력으로 도심 곳곳에선 벌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됐다. 길을 걷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고개를 드니, 학교 건물 옥상에 자리한 벌집이 빼꼼히 보였다. 그라차닌은 "한 호텔에선 옥상에서 채취한 꿀벌을 조식으로 제공한다"며 웃었다. 도심 양봉가는 50명까지 늘었다. 류블랴나 전체 양봉가가 400명 정도이니 비중이 상당하다. 유럽연합(EU)이 류블랴나를 '그린시티'(기후·환경 관련 우수한 정책을 보유한 도시)로 선정한 이유 중엔 '도심 양봉'도 있다.
류블랴나의 성공담은 다른 도시에도 전파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한다. 페트로우치치는 "도심 양봉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2, 3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된다"고 말했다. 국제양봉연맹 '아피몬디아'의 피터 코츠무스 부회장도 "밀원식물 심기 등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한국에서도 얼마든 가능하다"고 했다. 한국 국회도 2020년부터 국회도서관 옥상에서 도시생태 복원사업 일환으로 양봉을 하고 있는데, 이를 서울 전역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이다. 이미 이탈리아 체세나 등 유럽 도시들이 류블랴나의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류블랴나 정책을 본뜬 정책도 개발 중이다.
다만 도심 양봉을 선도하는 류블랴나에도 기후위기는 드리우고 있다. 기후위기는 꿀벌 개체수 감소를 야기한다. 페트로우치치는 "5월이면 섭씨 20도 중반으로 기온이 올라가고 꽃이 활짝 펴야 하는데, 올해는 5월 내내 춥고 비가 와서 벌들이 통 움직이지 못했다"며 "이런 이례적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코츠무스 부회장도 "꿀벌 사망은 겨울의 걱정거리였는데 이젠 여름에도 비슷한 걱정을 한다"며 "기후위기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류블랴나는 더욱 도심 양봉에 매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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